• 09.01잠 15:5-7슬기로운 신앙생활

    지혜는 어디서 오는가

    잠언은 솔로몬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혜와 훈계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다. 그의 평생에 잠언 삼천 가지와 노래 시 천다섯 편을 썼다고 열왕기상 4장에는 기록되어 있다.

    “그가 잠언 삼천 가지를 말하였고, 그의 노래는 천다섯 편이며”(왕상4:32).

    성경 잠언서에 있는 구절들은 그 중의 일부이다. 잠언의 핵심 주제는 ‘지혜’이다. 히브리어 호크마(המכח)로 표기된 이 단어는 일반적인 지식이나 지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뜻한다. 잠언 8장은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과 은총을 얻는다고 말씀한다.

    “내 입은 진리를 말하며 내 입술은 악을 미워하느니라”(잠8:7).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잠8:22,23).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잠8:35).

    여기서 1인칭 ‘나’가 지혜이다. 잠언은 우리에게 유익한 정보를 주는 격언이나 속담이 아니라,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믿고 하나님을 발견하라는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 잠언의 지혜와 비슷한 단어를 찾으라고 한다면,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말씀(Logos)이다.

    오늘 본문의 잠15:2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풀고”라는 말씀을 해석할 때에, 이 지혜는 예수님의 진리를 아는 자의 말을 뜻한다. 5절의 “아비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자는 미련한 자요, 경계를 받는 자는 슬기를 얻을 자”라고 할 때에 아버지의 훈계와 경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깨달은 부모의 가르침을 뜻한다. 우리가 슬기로운 신앙생활을 하기 위하여는 부모님의 훈계와 가르침에 순종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 인생의 길은 단 한 번뿐이다. 불교는 인생이 윤회한다고 가르치지만, 성경은 각자의 인생은 단 한 번뿐이고, 죽은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시90:3).

    슬기로운 자는 한 번뿐인 우리의 인생을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묻고, 신앙의 멘토에게 물어야 한다.

    어떤 유투버가 자기가 하려는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묻지 말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말했다. 다른 사람에게 물으면, 그것은 이미 다른 사람의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결혼하고 싶으면 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으면 된다고 하였다. 자녀를 가지고 싶으면 가지고 가지기 싫으면 갖지 않으면 된다고 하였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그냥 하면 되지, 다른 사람들에게 물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 사람의 사상에는 창조주 하나님이 없고 자기가 주체가 되어 있다. 자기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곧 진리이며 정의라고 생각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기 중심적인 사상이다.

    자기는 자녀가 없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물으면 “그래도 자녀는 있어야지”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묻게 되면 자기 인생에 혼선이 온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자녀가 필요하지만, 자신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구태여 자녀를 낳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자기만 생각하는 것이지 국가 공동체나 사회 공동체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모두가 그 사람처럼 생각한다면 지구 역사는 당대에 끝을 맺게 될 것이다.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정의로운가는 자기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결정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다(창1:28). 그렇다면 그 말씀에 역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떤가? 아무에게도 물을 필요 없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면 되는가?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한다. 진리의 말씀이 지시하는 방향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라”고 말씀하셨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수1:7).

    신앙 Mentor(멘토)에게 물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먼저 인생을 경험한 신앙의 선배들에게 묻는다. 최고의 인생 상담가는 담임목사와 부모이다. 물론 곁에 훌륭한 신앙의 선배가 있다면 그를 멘토로 삼을 수도 있다.

    “아비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자는 미련한 자요, 경계를 받는 자는 슬기를 얻을 자니라”(잠15:5).

    솔로몬은 부모가 신앙 멘토라고 말씀하고 있다. 특히 부모는 실패한 인생 경험을 바탕으로 자녀들을 조심시키고 삼가라는 것이 있다. 부모의 훈계와 경계시키는 것을 잘 듣고 순종하는 자녀는 슬기로운 사람이 된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인생 문제를 상담하는지는 대단히 중요하다. 다 맞는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신앙심이 깊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견해가 판이할 수 있다.

    행정고시를 치려고 열심히 고시원에서 공부하는 청년이 있었다. 그 청년이 고시치를 날, 며칠 전에 꿈을 꾸었다. 세 가지 꿈을 꾸었다. 첫째 꿈은 무를 밭에다 심지 않고 벽에다 심었다. 둘째 꿈은 삿갓을 쓰고 또 우산을 쓰고 있었다. 셋째 꿈은 사랑하는 애인과 등을 맞대고 누워있었다. 꿈이 하도 이상하여 근처 철학관에 가서 물었다. 꿈을 해몽하는 철학관 관장이 좋지 않는 꿈이라고 하였다. 무를 밭에다 심어야 하는데 벽에다 심었으니 허사로 끝맺음한다고 하였다. 삿갓을 쓰고 우산을 쓰고 있으니 그것 역시 소용이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애인과 등을 맞대고 누웠으니 그것 역시 좋지 않는 꿈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번 행시는 낙방할 것이니 다음 기회를 기다리라고 하였다.

    그는 우울해져서 시험을 치르지 않고 시골로 내려가려고 짐을 싸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고시원 주인이 왜 짐을 싸느냐고 물었다. 여차저차 사정을 말하였더니 그는 무슨 소리냐고 그렇게 좋은 꿈을 꾸어놓고 왜 내일 치를 행시를 포기하느냐고 말했다. 그 고시원 주인은 교회 안수집사였는데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청년의 꿈을 해몽하기를 긍정적으로 해석하였다.

    무를 벽에다 심은 것은 평범하지 않고 당신이 아주 높은 점수를 받을 징조라고 하였다. 그리고 삿갓을 쓰고도 우산을 받치고 있는 것은 비 맞지 않을 준비가 철저히 되었다는 뜻이니, 시험 대비를 철저하게 했다는 뜻이니 합격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애인과 등을 맞대고 누운 것은 손만 뻗으면 돌려 눕게 하여 마주 보고 누울 수 있으니, 조만간 둘 사이의 사랑이 싹트게 될 것이라고 좋게 해몽하였다. 청년은 용기를 내서 다음 날 행정고시를 치렀고 그 집사의 말대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다고 한다. 될 수 있으면 꿈은 긍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하나님께 묻고 응답을 받아라

    지혜로운 자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자주 묻는다. 기도는 처음에는 입으로 한다. 자기의 어려움이나 소원을 아뢰고 도움을 간구한다. 그러나 신앙의 수준이 높아지면 귀로 기도한다. 하나님께 묻고 듣는 기도를 한다. 그래서 신앙심이 깊어지면 매사에 하나님께 묻고 응답을 듣는다.

    구약성경에는 신앙 인물들이 중요한 일이 생기면 하나님께 물었다. ‘묻다’란 단어는 히브리어 다라쉬(שרד)란 단어인데, “묻다, 찾다, 구하다, 요구하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창25:22에 이삭이 40세에 장가를 갔다. 아내 리브가가 아기를 임신하지 못했다. 20년 동안이나. 그래서 아내가 남편에게 제발 아기를 낳게 해 달라고 호소하였고, 남편 이삭이 기도하여 임신이 되었다. 그런데 아내의 태 중에 있던 쌍둥이 아들들이 서로 싸웠다. 걱정이 된 이삭이 하나님께 물었다. 하나님이 응답하시기를 “두 국민이 복 중에서 나누어지며,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창25:23).

    우리는 자녀의 출산과 임신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자녀들의 장래를 하나님께 물어야 한다. 내가 원하는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녀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물어야 한다.

    출3:13에는 모세가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명을 받고 하나님께 물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하면 어떻게 대답할까요”라고 물었다.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이름을 말씀해 주셨다. 사명을 받은 자는 하나님께 그 길을 묻고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교회 사역자뿐 아니라, 교회 봉사자들은 하나님의 방법과 뜻을 물어야 한다.

    민27:21에 보면 여호수아는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묻고, 제사장은 여호와 하나님께 물었다. 하나님은 우림의 판결로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셨다. 일반 성도들이 직접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영적 선지자이면서 제사장인 담임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한다. 결혼과 취업과 사업의 중요한 사건이 있을 때마다 목회자들에게 묻고 기도를 받는 것이 필요하다.

    구약의 왕들이 전쟁을 하기 전에 반드시 선지자들을 찾아가 하나님의 뜻을 물었다. 악한 왕 아합은 ‘미가야’ 선지자가 자기에게 흉한 일만 예언한다 하여, 그에게 묻지 않았다. 그러나 함께 전쟁에 협력하는 유다 왕 ‘여호사밧’은 미가야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미가야는 그 전쟁에서 아합이 죽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왕상22:7).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는 왕하1:16에서 보면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이 들었다. 그런데 엘리야 선지자가 있던 시대에 여호와 하나님께 묻지 않고,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어보려 했다가 그 병으로 죽고 말았다.

    신자가 하나님께 묻지 않고 무당이나 점쟁이에게 물으면 하나님의 저주가 임한다. 하나님께 묻지 않는 신자들을 하나님은 매우 싫어하신다.

    신약 성경에서도 제자들은 늘 예수님께 질문하였다. 요9:2에는 날 때부터 맹인으로 태어난 자를 보고 누구의 죄로 그가 맹인이 되었는지 물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9:3).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고 실패했을 때도 예수님께 그 이유를 물었다. 어떤 아버지가 제자들에게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왔는데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다(막9:18). 제자들은 자기들이 왜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는지 예수님께 물었다.

    우리는 성공하는 일뿐만 아니라 실패한 것도 그 이유를 주님께 물어야 한다. 주님은 우리가 쉬지 않고 기도하며 우리의 문제를 묻고 응답 받기를 원하신다.

    가장 곁에 가까이 있는 멘토는 담임목사이다. 인생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기 전에 먼저 충분히 기도하고 담임목사님께 의논을 드리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것이다. 부모나 신앙의 스승이나 구역장 등 기도를 많이 하는 자를 멘토로 두면 인생 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도움을 입을 수 있다.

  • 08.04요 13:12-20제자들의 발 씻기신 사건

    발 씻긴 사건의 두 가지 의미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건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하나는 주님의 속죄의 사랑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겸손해져서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다 씻어주신 후에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고 물으셨다(12절). 우리는 주님이 왜 제들의 발을 씻겨주셨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어야 한다.

    주님이 제자들과 오늘 우리에게 이 사건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은 주님만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은혜를 입은 자들은 인격적으로 겸손해져서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를 이루어 가기를 원하셨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3-15절).

    예수님은 우리 영혼의 주인이시다. 주님이 주인 되신 것은 우리가 죄로 인하여 멸망 받을 것을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지옥의 형벌을 대신 받으시고 우리를 대속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스승이 되신 것은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는 것인지 스스로 본을 보이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여 스스로 낮아질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겸손해지지 않고는 남을 사랑할 수 없다.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 없이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 세상의 인심은 각박하다. 이기적이고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남을 이용한다. 자기를 지나치게 사랑하여 부모나 가족들마저도 희생시키는 경우가 있다. 말세가 되면 “자기를 사랑하고 이기적이며 부모를 거역하고 교만하게 된다”고 하였다.

    박윤선 박사도 그의 주석에서 본문의 이 사건은 겸손과 속죄의 사랑을 나타낸 것이라고 하였다(박윤선, 요한복음 하, 영음사, 1985, 411). 1절에서 예수님이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말씀은 하나님이 계속 하여 택한 백성들을 사랑하셨지만, 독생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목숨을 바치기까지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어주심과 같이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를 대속의 피로 씻어주심으로 우리는 깨끗해지는 것이다.

    칼빈(Calvin)도 8절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씻어 주지 않으면 온갖 더러운 죄를 씻을 방도가 없다”고 하였다(칼빈 주석, 요한복음2, p.58). 주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허물과 죄를 씻어 주실 수 있는 분임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1:7,8).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미 목욕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고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 ‘어거스틴’(Augustine)은 “사람이 세례를 받으므로 온 인격이 깨끗해진다. 그러나 그 후에도 살아가면서 땅의 것으로 인하여 더러워진다. 그러므로 다시 회개해야 한다”고 말했다(Catena Aura4, Oxford, p.427-428).

    구원의 신비롭고 오묘한 섭리

    구약의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언약궤의 속죄소 위에 제물의 피를 뿌리기 전에, 먼저 성막의 뜰에 있는 물두멍에서 손발을 씻는다. 그와 같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대야에 물을 담아 와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다. 그리스도는 영적 대제사장이다.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대제사장이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도 영적 대제사장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져야 한다. 회개하여 깨끗함으로 받지 않으면 하나님께로 나갈 수 없다.

    교회에 다니는 것만으로 구원에 이르지는 않는다. 주님은 제자들 모두 깨끗한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10절).

    하나님은 창세 전에 구원할 자들을 선택하셨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택함을 받은 자들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4,5).

    대속의 피를 흘리실 주님은 “선택하신 자들이 누구인지 아신다”고 말씀하셨다(18절). 그러나 열두 제자 전부는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이미 구약 성경에서 예수님을 배신할 자를 예언하였는데(시41:9), 그 구약의 예언이 성취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18절).

    ‘발꿈치를 들었다’는 것은 저항과 배반을 상징하는 행동이다. 뜻을 함께 하지 않고 거기서 발을 뗐다는 의미가 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먹었다. 예수님이 직접 떡 한 조각을 초장에 찍어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다(26절). 주님이 직접 떡 한 조각을 건네주는 그 사람이 예수님의 배신자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가룟 유다에게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하셨을 때, 제자들은 그가 헌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쓸 물건을 사라 하시거나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는 줄로 생각하였다(29절). 제자들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 배신자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선택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처럼 보였지만 사탄이 그 영을 지배하였다. 예수님이 자신을 팔 자가 누구인지 알려주셨지만, 다른 제자들은 알지 못했다. 다만 가룟 유다 자신은 분명히 알았다. 그럼에도 그는 회개하지 않고 자기의 계획대로 예수님을 은 30개에 팔고 말았다.

    자신이 배신자라는 것이 드러나는 순간에 사탄이 가룟 유다의 마음에 들어갔다고 요한 사도는 기록하고 있다.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27절).

    가룟 유다는 사탄에게 사로잡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구원의 섭리가 무섭고도 오묘하다.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이라는 시대와 시간을 초월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구원은 이루어진다. 비록 교회 공동체 안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일지라도 구원의 은혜에서 제외되는 사람이 있다.

    구원받았나요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13:5).

    ‘애드리언 로저스’(Adrian Rogers)목사는 “사탄은 인간 말종보다 교회 잘 다니는 사람을 지옥 보내고 싶어 한다”고 말하였다. 또 그는 말하기를 주일이 되면 거듭난 적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온다. 그 누구도 가룟유다를 의심하지 않았던 것처럼, 교회 안의 불신자들을 의심하지 않는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의 12제자 중 한 사람이었고,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녔다. 당연히 구원받고 천국 갈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가룟유다에게 “가룟유다 너는 구원을 받았니?”라고 묻느다면, 그는 대답하기를 “나 교인이라도 보통 교인이 아니야. 나는 예수님의 제자야. 예수님이 개척한 최고의 교회 일원이야”라고 말할 것이다.

    “내 질문은 그게 아니야, 너는 거듭나고 정말 구원을 받았니?”라고 되물었을 것이다. 여러분은 세례증서와 교회기부금 증명서를 가지고도 지옥 갈 수 있다. 잘 들으시오. 하나님의 무서운 경고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은 유대 회당에 나가는 종교인들이었다. 우리 모두를 향한 경고이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으면 안 된다. 우리는 예수님이 인정하는 구원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거듭난 새 사람이 되어야 한다.

    유대인이 아니라도 복음을 듣고 변화받은 자들이 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방인이라도 겸손하게 복음을 전해 듣고 그리스도인이 되기도 한다. 가나안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이 구원을 받았다. 모압 여인 ‘룻’이 이스라엘의 왕 다윗 가문의 증조모가 되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빛이 비치게 하셨고, 오늘날 한국을 비롯한 여러 민족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의 대열에 참여하였다. 하나님의 선택은 신비하고 오묘하다. 인간의 지식이나 경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만 가능하다. 구원받은 자의 고백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오직 사랑이다.

    겸손과 사랑의 실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주님은 십자가 사건 이후에 나타날 교회 공동체의 사랑 실천을 권면하셨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은 주님처럼 겸손하게 낮아져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교훈하셨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34,35절).

    주님의 제자로 살려면 남의 발을 씻듯이 겸손하게 낮아져서 섬기고 봉사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전도하여 죄 씻음을 받고 구원에 이르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본받아 서로 사랑할 때에 세상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알게 될 것이다.

  • 07.28요 12:1-26인류를 살리신 그리스도

    인류 역사에 단 한 번뿐인 특별한 유월절

    요한복음 12장은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누누이 예언했던 바로 그 인류의 구세주가 예수님이란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린 사건이 다시 한 번 더 기록되어 있다(9-11절). 그리고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닦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1-8절). 그리고 세 번째는 그리스도가 왕으로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는 장면이다(12-13절). 그리고 그 그리스도가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다(14-19절). 그리고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리실 것과 온 세상을 심판하는 심판주로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하셨다(28-33절).

    이 모든 말씀의 핵심은 메시야이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회개하는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신다는 것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사도 요한은 인류 전 역사의 대전환점의 “그 날”에 초점을 맞추어 요한복음을 기록하고 있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1절).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12절).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13:1).

    인류 역사 속의 이 특별한 유월절은 그리스도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이 목숨을 대신 바치는 유월절이다. 이스라엘 역사의 첫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해방시킬 때 속죄양이 대신 피를 흘려 그 피를 이스라엘 사람들의 문설주에 발랐다. 피를 바른 집은 하나님의 사자가 “건너뛰었다”(pass over)하여 ‘유월’이라고 했다. 역사에 한 번밖에 없는 이 특별한 유월절에 피를 흘릴 속죄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래서 D day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는 ‘그 날’에 시간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장례를 준비하다

    많은 유대인들이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의 집을 찾아왔다. 죽었다가 회생한 ‘나사로’와 그를 살리신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였다. 대제사장들은 군중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자 다시 살아난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이제 구 일 뒤에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부활하는 더 놀라운 사실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은 십자가에 죽었던 예수님이 삼 일만에 부활한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이요 부활이신 것이 증명되었다. 그 예수님은 온 인류를 살리기 위하여 자기가 대신 죽으신 것을 온 인류가 믿게 되었다. 그 분은 진정한 메시야이심을 온 인류가 믿게 될 것이다.

    나사로의 사건과 연계하여 그의 누이 ‘마리아’가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부은 사건에 대하여 요한은 기록하고 있다. 가룟유다는 마리아가 300데나리온이나 하는 대단히 비싼 향유를 낭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사건은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대신 목숨을 버리실 대속주의 장례를 준비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하나님의 거룩한 수 많은 백성을 살리기 위한 죽음이므로 그 죽음과 장례에는 거기에 걸맞는 향품이 들어가야 마땅하다. 일국의 군주가 죽어도 엄청난 경비를 들여 무덤을 만들고 몰약과 향품을 몸에 넣는데, 예수님의 몸에 마리아가 부은 향유를 허튼 일에 낭비한 것으로 해석해서야 되겠는가?

    서오능에 가면 순창원이란 능이 있다. 조선 13대 명종의 장자 순회세자의 묘이다. 그는 7살에 세자로 책봉을 받고 왕이 되지 못하고 병을 얻어 13세에 죽었다. 어린 소년이었지만 왕이 될뻔한 사람이었으므로 왕능만큼 크지는 않아도 그 비슷한 왕자의 능을 만들고 후일에 그의 부인인 왕세자빈의 무덤까지 함께 만들었다.

    어찌 이런 왕족과 예수님의 죽음을 비유하겠는가? 예수님은 온 인류를 위하여 죽으셨으니 무덤을 크기로 말하면 세상에서 제일 큰 무덤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은 역사에 없다. 예수님은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죽으실 수 없는 분이다. 단지 인간의 죄를 위하여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대신 십자가에 죽어주셨던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7절).

    주님은 마리아의 선한 행위에 대하여 만류하지 말고 그냥 두라고 말씀하셨다. 마리아의 행위는 예수님의 장례를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엿새 전 사건이므로(1절) 주님의 죽음이 임박한 시기였다. 온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희생하실 위대하신 구세주께 그 정도의 향유를 부어 드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나귀 새끼를 타신 그리스도

    그 이튿날에는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기 위하여 나귀를 타고 거리를 행진하였다. 세상의 왕은 승전 후에 백마를 타고 군사들과 함께 의기양양하게 입성한다. 그러나 평화와 구원의 왕이신 예수님은 전쟁하는 말이 아닌 짐을 나르는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다. 겸손하시고 온유하신 평화의 왕은 권력자의 모습이 아닌 인류의 짐을 대신 지시는 왕으로 입성하셨다.

    주전 520여 년 전의 선지자 스가랴는 인류의 구세주는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슥9:9,10).

    예수님은 예언된 말씀대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군중들은 왕을 환영하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환영하였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외치며 찬송을 불렀다(13절). ‘호산나’(ώσαννά)는 “구하오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간청이다.

    시편 기자는 장차 오실 메시야는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될 것이고, 그 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호산나 찬송을 부를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시118:22-25).

    나사로의 회생을 목격한 사람들이 명절에 모인 많은 군중들에게 예수님은 무덤에 나흘이나 묻혔던 나사로를 불러내어 살린 분이라고 증언하였다(17절). 주님을 찬양하는 군중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했던 바리새인들도 감히 감당할 수 없는 거룩한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십자가에 달리실 대속자 그리스도

    유다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와 같이 다윗의 왕통에서 메시야가 오신다고 했기 때문에 왕(호 바실류스: ό βασιλεύς)이라고 외쳤다. 정치적인 왕이라기보다는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 그들이 기다려왔던 메시야란 뜻이다. ‘누가’도 이 부분에 대하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눅19:38).

    예수님은 이제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말씀하셨다(23절). 그것은 곧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비밀이었던 인류 구원의 계획이 성취될 때가 온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한 알의 밀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고 묻히면 많은 생명을 구원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24절).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32,33절).

    주님은 자신이 섬기는 자, 대속자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시고 인류의 죄의 값을 치르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입은 성도들도 교회와 이웃을 섬기는 자로 살아야 한다. 다른 이들의 죄를 용서하고 그들의 죄의 값을 대신 지불하는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26절).

    ‘섬기는 자’는 헬라어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이다. 억지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섬기는 종이라는 단어이다. 강제적으로 행하는 종은 ‘둘로스’(δούλος)이다.

    요한복음 12장은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를 위하여 죽으시기 위하여 오신 겸손한 왕이시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시면서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셨고, 죽은 나사로를 회생시킴으로 죽은 자의 영혼을 구원해 내실 인류의 구세주이신 것을 확인시켜 주셨다. 그리고 주님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을 예언하셨다. 그리스도가 땅에서 들림으로 모든 사람들이 그 주님을 믿고 구원을 받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32절). 주님의 제자들도 밀알이 땅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헌신하므로 수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라고 말씀하셨다.

  • 07.07요 10:7-18양들과 선한 목자

    우리를 살리신 그리스도

    예기치 못한 사건, 사고들로 전 세계에 많은 생명이 목숨을 잃었고, 지금도 여전히 희생되고 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살인한 이후에 인간의 역사는 죽음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오셨다. ‘죽음’으로 점철된 이 세상을 ‘살림’의 역사로 바꾸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또 부활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을 대속 제물로 희생하시고 우리를 살리셨다. 죽임의 역사를 이어온 인간들은 마침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지만, 하나님은 다시 그를 살리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그를 믿는 많은 사람들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 신실한 믿음의 성도들로 말미암아 세계 곳곳에 교회가 세워지고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하게 되었다.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을 목자로 그의 백성은 양떼로 묘사하고 있는 부분이 많다. 시편 23편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하였다(시23:1). 시편 79편에는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시79:13).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시80:1).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설명할 때에 가장 이해하기 쉬운 비유가 목자와 양의 관계이다. 이스라엘은 고지대가 많고 광야라서 농업보다는 목축업이 알맞았다. 양을 방목하려면 목자는 필수적으로 있어야 했다. 목자는 늑대와 같은 야생 맹수와도 싸우고, 간혹 있는 도둑이나 강도와도 싸워야 했다. 그러므로 목자들이 간혹 양을 지키다가 죽을 수도 있었다. 양들은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었기에 목자들이 책임지고 양들을 지켜야 했던 것이다. 양들에게 있어 목자는 자기들의 생명을 지켜주는 보호자였다. 목자들은 한시도 쉬지 않고 양들을 사랑하고 보살폈다. 목자들은 퇴근의 개념이 없었다. 밤에도 양 우리의 문 앞에서 양떼를 지키며 잠을 잤다.

    17절에서 “주님이 목숨을 버리신 것은 우리의 생명을 다시 얻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다. 우리가 죽음의 세상에서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면 살림의 역사가 일어난다. 예수님 안에서는 더 이상 죽음은 효력을 발생하지 못한다. 예수님 안으로 들어오면 죽음은 마침내 힘을 잃고 만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영생을 얻게 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

    믿음의 공동체는 살리는 공동체이다.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다(요12:24). 내가 헌신하고 희생하면 살리는 역사가 일어난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10,11절).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까닭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다. 뿐만 아니라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다. 이 말은 헬라어 ‘페리손’(περισσον)인데, 그 사람의 영혼뿐만 아니라, 그를 통하여 다른 사람들의 영혼까지 축복하기 위해서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축복의 통로가 되어 타인들도 전도하게 되고 더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게 된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샘물이 계속 솟아나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잘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샘물처럼 솟아나게 된다. 나만 그 물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많은 영혼들이 그 물을 마시고 영생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양의 문

    예수님은 양의 문이라 말씀하셨다. 즉 구원의 통로, 평화의 통로가 된다는 것이다. 양들은 문을 통하여 들어가고 나온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9절).

    양은 문으로 들어간다.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을 내 마음의 자리로 모시는 것이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내가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성령님이 베푸시는 은혜와 복을 받을 수 있다. 주님을 마음 문 밖에 세워두고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주님과 영적으로 하나가 될 수 없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양들이 저녁에 우리로 들어가야 맹수나 도둑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를 받는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만 구원을 받는다.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와 사랑이 없으면 죄와 사탄의 권한에 속하게 된다. 양들이 우리의 문에서 나오고 들어가면서 좋은 꼴을 얻는다. 우리의 문은 하나다. 보통 바위 굴이 있는 곳에 돌담을 쌓고 문을 내고 양들을 보호한다. 예수님이 양의 문이란 의미는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보호하고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예수님 외에 구원주가 없다. 불교의 석가모니나 유교의 공자나 이슬람교의 모하멧이 구원주가 될 수 없다. 신천지의 이만희나 북한의 김일성이가 신이 될 수 없다. 그들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다. 인간이 지은 죄에 형벌과 저주를 내리신다. 그러므로 인간이 죄 사함을 받으려면 누군가가 그 무거운 죄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오직 죄 없으신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형벌인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지불하셨기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 구원이 있는 것이다.

    불교의 고승 ‘성철’은 자신의 죄가 산 만큼 높고 크다고 했다. 그런데 자기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니 자신은 죽어 지옥에 간다고 유언을 남겼다. 불교의 교주 석가모니는 인간의 고뇌를 위하여 보리수나무 밑에서 수양을 하고 도를 닦았다. 사후세계를 묻는 그의 제자에게 석가모니는 “죽은 다음의 일을 알지 못한다”고 고백하였다. 예수님 외에는 구원할 자가 없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고,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한 형벌과 저주를 대신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주이시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11절).

    영혼의 보호 장치

    예수님이 우리 영혼의 문이고, 선한 목자이므로 우리를 악으로부터 보호하신다. 사과에 껍질이 벗겨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과는 변색이 되고 마르고 썩게 될 것이다. 우리의 영혼에도 껍질과 같은 보호 장치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을 보호하는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라오는 연약한 군중들을 향하여,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했다”고 말씀하셨다(마9:36). 양의 보호자는 목자다. 목자가 없는 양떼는 어떤 위험을 당할지 모른다. 맹수가 덮치는 날에는 꼼짝없이 당하고 말 것이다.

    ‘고생하다’(에클뤼오: έκλύω)의 뜻은 “껍질을 벗긴다, 가죽을 벗긴다”는 말이다. 가죽이 벗겨질 정도로 힘들었음을 뜻한다. ‘기진하다’(립토)의 뜻은 “내던진다”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호가 없으면 우리는 껍질이 벗겨지는 것 같은 영혼의 고난을 당한다. 믿음이 굳건해야 우리의 영혼을 지킬 수 있다. 믿음으로 우리의 영혼을 보호해야 어떤 시험과 역경이 와도 넘어지지 않는다. 예수님을 굳게 믿지 않으면 껍질 벗겨진 과일과 다를 바 없다. 목자 없는 양은 보호 장치를 상실한 것이다. 항상 목자 되신 주님의 인도와 성령님의 감동이 있도록 기도하는 것을 쉬지 않아야 한다.

    저녁이 되면 목자들이 양들을 불러모아서 우리에 들어가도록 한다. 돌담을 쌓아서 맹수들이 침범할 수 없도록 하고 양들이 문으로 다 들어간 후에는 목자가 그 문 입구에서 잠을 잔다. 도둑이나 강도가 양을 훔쳐가려면 목자를 밟고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양을 빼앗아 가려면 맹수이든지 강도이든지 목자는 양들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싸운다.

    사탄과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의 보호 장치인 믿음을 벗겨내려고 한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이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보호해 주신다. 우리는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믿음에 굳게 서서 영적으로 승리해야 할 것이다.

    목자의 음성을 듣고 꼴을 먹으라

    양들은 목자의 인도하심에 따라 꼴을 잘 먹어야 한다. 양은 육식을 하지 않는다. 다른 동물을 사냥한 고기나 피를 먹지 않는다. 하나님의 양들인 성도는 세상적인 사상이나 관습이나 정치적 이념에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산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9절).

    양들이 좋은 꼴을 먹으려면 목자의 음성을 알고 따라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귀를 기울여야 하고, 담임목사의 설교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이 매 주마다 주시는 말씀을 먹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사탄이나 이단들이 말하는 것인지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3,4절).

    호주에서 어떤 사람이 목자의 옷을 입고 양들을 불렀으나 양들이 주인 목자의 음성이 아님을 알고 도망을 쳤다. 그런데 목자가 다른 옷을 입고 불렀더니, 그 음성을 알고 따라왔다고 한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새서울교회의 직분자로 세우신 것은 담임목사와 협력하고 도와서 교회를 섬기라는 뜻이 있다. 그래서 담임목사가 “기도합시다. 선교합시다”할 때에 그 음성을 듣고 잘 순종하고 따라야 한다.

    어떤 교회에 부흥회를 했다. 강사가 우리 교단의 유명한 선교사였는데 서너 명의 권사들이 은혜를 받고 자기 교회 성경공부는 안 하고, 그 강사의 유투브에 들어가 그 쪽 공부를 하고 선교헌금도 담임목사의 허락 없이 그리로 직접 보내고, 본 교회가 명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담임목사의 설교를 잘 듣고 순종하지 않으니 서로가 마음이 불편하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는 교회가 되라고 말씀한다. 양떼의 마음이 흩어지지 않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16절).

    우리의 선한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님 중심으로 믿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가 분열되지 않고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27,28절).

    우리가 주님을 잘 따르게 될 때에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된다. 악한 사탄이 결코 하나님의 자녀를 빼앗아 가지 못한다.

  • 06.20요 9:1-41세상의 빛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

    예수님은 우리 영혼의 영원한 빛이시다. 범죄하여 어둠의 권세에 사로잡혔던 우리를 십자가의 사랑으로 죄를 사하시고 의로운 삶을 살게 하셨다. 9장은 예수님이 온 인류의 빛이신 것과 그 증표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기적을 나타내셨다.

    사도들이 맹인의 눈을 뜨게하였다는 기록은 신약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맹인에게 눈을 뜨게 하신 일은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란 증표다. 이사야 선지자는 온 인류에게 메시야 구원주가 오시는 그 때에 맹인이 눈을 뜨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사35:5).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찾아와 “오신다는 메시야가 당신입니까? 아닙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말씀하셨다(마11:3-5).

    예수님이 구약시대에 예언된 오실 메시야이심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표징이 맹인을 눈 뜨게 하는 것이다.

    30-33절에 눈을 뜨게 된 사람이 말하기를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율법을 잘 아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눈을 뜨게 하신 분이 어디서 오셨는지 모른다는 것이 이상하다고 말했다. 그 동안 맹인이라고 천대받던 그도 알고 있는 예언이었다. 그는 바리새인들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고 확신하였다.

    예수님께서 길을 지나시다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셨다(1절). 주님이 그를 불쌍히 보신 것이 그에게 복이 되었다. 우리는 영적인 맹인이었다. 진리를 알지 못했고, 신령한 세계를 깨닫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에게 찾아오셨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주님의 자녀로 불러주셨다. 주님이 나를 보시고 가까이 찾아오셔서 은혜를 베푸셨다.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찾아온 것이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며, 놀라운 사랑이다.

    그 당시 맹인은 불치의 병이었고, 사람들은 맹인들이 특별한 죄로 인하여 벌을 받은 것으로 인식하였다. 구약 성경에는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에게는 삼사 대까지 죄를 물으신다고 하였다.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20:5).

    하나님의 계명과 율례를 지키지 않는 자는 들어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신28:16).

    구약의 율법에는 인과응보와 권선징악의 사상이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그 당시 사람들은 맹인이나 나병환자는 그 본인이나 부모가 죄를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벌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가 맹인이 된 연유가 그 사람에게 있는지, 그 부모에게 있는지 물었다. 그런데 주님의 대답은 의외였다. 그 본인이나 그 부모의 죄 때문에 맹인이 되었다고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의미심장하게 말씀하셨다(3절).

    예수님은 그 사람이 겪는 불행의 원인을 찾으려 하지 않으시고, 그 불행 속에 하나님의 뜻과 주님의 사명이 있다고 생각하셨다. 주님은 그 사람을 통하여 자신이 어떤 일을 하기 위하여 오셨는지 말씀하시려고 하였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으로 오셨음을 설명하기에 아주 적당한 타이밍이었다. 그 맹인은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심을 나타내는 좋은 도구가 되었다. 맹인이 불행하거나 죄가 많다는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일에 그 사람이 쓰임을 받는다는 관점으로 보았다.

    우리는 불행이나 고난을 해석할 때에 예수님의 관점을 따라야 한다. 이미 불행 중에 있는 사람에게 그 원인을 캐서 마음의 고통을 더 가중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찾고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었다. 그에게 무슨 잘못을 추궁하겠는가? 우리는 불행을 당한 사람들, 즉 수해를 당했거나 지진이나 가뭄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을 때, 그들의 죄를 추궁하기보다도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 이웃이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병을 고친 자의 사명과 믿음의 고백

    주님이 구원하시려는 이 세상 사람들이 맹인과 같이 하나님에 대하여 캄캄하다. 마치 진흙으로 사람을 창조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그 맹인이 ‘실로암’에 가서 눈을 씻게 될 때에 한 번도 접하지 못했던 세상이 그 사람의 눈에 비춰졌다. 실로암(Σιλωάμ)은 “보냄을 받다”(7절)는 뜻이다. 주님은 그 자신이 세상의 빛이신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 사람을 쓰셨다. 그가 밝은 눈으로 보고, 바리새인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 증언하므로 예수님은 구약에 예언되었던 빛으로 오신 메시야이신 것을 밝히 나타낸 것이다.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49:6).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4:2).

    예수님은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 맹인의 눈에 발랐다. 실로암 물에 가서 씻도록 하기 위하여 상징적인 행위를 하신 것이다. 주님이 말씀으로 치료하시지 않고 왜 번거로운 방법을 택하셨을까? 어떤 맹인에게는 눈에 침을 뱉으시고 안수하여 눈을 뜨게 하셨다(막8:22-25). 여리고에서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하실 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다. 그리고 그가 눈 뜨기를 간절히 원했을 때,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다(막10:52). 그리고 또 어떤 맹인들에게는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고 물으셨고, “주여 그렇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말씀하셨다(마9:27-30).

    눈을 뜨게 된 다른 맹인들의 믿음을 강조한 것과 비교해 보았을 때, 본문에 등장한 맹인은 예수님이 하시는 대로 피동적으로 움직인 것만 기록하였다. 주님이 그의 믿음을 드러나게 하시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은혜와 기적으로 눈을 뜨고 난 후에 여러 번 예수님이 자기의 눈을 뜨게 했다고 간증했다. 자기에게 일어난 기적을 사람들에게 증언하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이신 것을 드러내었다.

    진흙을 침으로 이겨 눈에 바른 것은 이례적인 사건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빚어 만드셨다. 그리고 생령을 코로 불어넣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첫 사람 아담을 창조하셨다. 예수님은 인간의 창조주이시고, 이제 세상에 와서 타락한 인간을 회개시키고 새 사람을 만드셨다. 주님은 그 맹인이 단순하게 눈만 뜨기를 바라지 않으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재창조해 내시는 분임을 나타내신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영혼의 눈을 뜨고 진리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구원주인 것을 깨닫게 하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 된 것이다.

    믿음의 사람에게 영안을 열어 새로운 영적 세계를 보게 하셨다. 그러므로 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면서 눈에 진흙을 발라서 실로암에 가서 씻고 눈을 뜨게 하신 것은 그리스도는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고 새사람을 만드시는 분임을 깨닫게 하셨다. 비록 눈이 어두운 사람이었지만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을 때, 육신의 눈도 뜨고 예수님도 구주로 믿게 되었다. 이 사람의 경우는 나중에 믿음을 고백하였다. 육신의 치유와 믿음은 같이 나타나야 한다. 믿음이 있어야 병 치유가 진실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38절).

    여기서 ‘절하다’라는 헬라어 ‘프로스-에쿠네센’(προσεκύνησεν)은 단순한 존경을 표할 때 쓰는 단어가 아니고,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쓰는 단어이다. 그는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분은 유대인들이 기다려 오던 메시야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 구세주에게 경배를 드린 것이다.

    영적 맹인들아 눈을 뜨라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빛이신 것을 믿지 못하면 그는 영적인 맹인이다. 이 본문에는 육신의 눈을 떴으나 영적 맹인인 자들이 등장한다. 16절에 이 사건에 대하여 쟁론하는 바리새인들이 나타나 있다. 그들은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난 사건에 대하여 왈가불가 하였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들의 생각을 늘어놓으며 쟁론하였다.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일어나니”(16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왜 안식일을 범했다고 생각했을까? 예수님은 진흙으로 반죽하여 그 맹인의 눈에 발랐다. 유대인들은 건축할 때에 진흙으로 반죽을 하여 벽돌을 만들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음식을 만들려고 반죽을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병자를 치료하는 행위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주님은 안식일 날 맹인을 치료하여 낫게 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주로 믿지 않으면 인간의 생각과 신학적 쟁론에는 답이 없다. 구원의 문제는 오직 하나님의 방법과 길만 옳다. 사람의 생각과 지혜는 일리가 있을지라도 완전한 답을 아니다. 욥기의 기사에도 보면 “욥이 왜 고난을 받는가” 하는 질문이 계속 이어지고, 욥의 세 친구와 엘리후의 말들이 나온다. 물론 그들의 말은 모두 이치에 맞다. 그러나 정확한 답은 아니다. 그들의 공격적인 말에 대하여 욥이 변론하였다. 그러나 욥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완전한 답은 아니었다. 오직 하나님의 방법과 뜻만 완전하고 옳았다.

    오늘 우리가 영적 맹인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는 자기의 지식과 경험에 있지 않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는데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의 빛으로 믿고 따를 때에 구원을 주어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아무리 오래 연구하여도 바리새인들처럼 자기들의 생각만 늘어놓는다면 거기에는 구원도 없고 인생의 해답도 없다.

  • 06.09렘 1:1-10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

    예레미야는 누구인가

    6월은 호국 보훈의 달이다. 현충일과 한국전쟁인 6.25사변 기념일이 있어 더욱 나라와 국군장병들을 생각나게 하는 달이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 나라를 기독교 정신으로 지켜나가야 하는 기독교인으로서의 사명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달이다.

    특히 구약의 선지자들 가운데서 이스라엘이 전쟁의 위기에 놓였을 때, 선지자의 시명을 받고 눈물로 기도했던 인물이 예레미야이다. 그는 애국자이면서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멸망하게 될 것을 예언했던 인물이다. 예레미야의 신앙 정신을 통하여, 오늘 우리의 신앙 정신을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예레미야 그는 누구인가?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가 던지셨다”이다. 그는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던져진 사명자였다. 그는 베냐민의 땅 ‘아나돗’의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이름은 ‘힐기야’이다(1절). 그는 유다 말기의 가장 불행했던 시기에 예언했던 인물이다. 요시야 왕 13년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아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 11년까지 예언했던 사람이다(B.C.626-587). 예루살렘 거주민들이 바벨론에 사로잡혀 갈 때까지 약40년 동안 예언했던 선지자이다.

    이스라엘의 제사장들마저 영적으로 타락한 시대에 소수의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들 중 한 명이 예레미야 선지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을 숭배하고 세속적으로 타락해 갔을 때에도, 기도하던 소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경건하게 살려고 애를 썼다.

    예레미야서 35장에 등장하는 레갑 족속이 그렇게 살았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의 명령에 따라서 그들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않고, 좋은 집도 짓지 않고 장막에서 거주하였다. 참된 진리와 영성은 다수에 의하여 결정되거나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비록 소수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살려고 최선을 다하는 자들에 의하여 진리는 지켜진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 사람들처럼 넓은 길로 가지 말고, 좁은 길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비록 좁은 길을 찾는 자가 많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길이면, 좁은 길로 가야 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3,14).

    예레미야는 자기 백성들이 바벨론에 멸망할 것을 경고하면서 우상을 철폐하고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외쳤다. 그는 백성들이 당할 고통을 미리 알고 쉬지 않고 기도했으며 눈물로 호소하였다.

    우리도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쉬임없이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비통한 한국전쟁의 역사를 상기하자

    호국 보훈의 달 6월은 우리의 부모님과 조부모님들이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것을 상기해야 한다.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 모두 곤하게 잠들어 있던 시간에 북한 공산주의 침략자들은 탱크를 앞세우고 불법으로 침략을 감행하였다. 군사도 무기도 남한은 부족하였다. 그 때도 평화만 부르짖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국방을 튼튼히 하지 못했다. 전쟁은 물밀 듯이 남쪽으로 밀려 내려왔다.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우리는 미국을 비롯한 우방 나라들의 희생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미군은 1950년 7월 1일 한국에 첫 발을 디딘 이후 3년 1개월 동안 전쟁을 치르면서 전사자 54,246명을 비롯하여 실종자 8,177명, 포로 7,140명, 부상자 103,284명 등 172,800여 명이 희생당했다. 국군 희생자 645,000명에 비해 무려 27%나 된다.

    특히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아들을 비롯한 장군급의 아들 142명이 참전하여 35명이 전사하였다. 거기는 장관과 미8군 사령관의 아들도 포함되어 있다. 미국 대통령의 아들 아이젠하워 중위는 1952년 미3사단의 중대장으로 참전하였다. 대통령의 아들이 남의 나라에서 전사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미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은 그 아들과 함께 부자가 희생되었다. 미국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임관한 신임 소위 365명 중에 6.25 전쟁에 참전하여 죽거나 부상당한 자가 110명이나 되었다.

    한국 국군이 자기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가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지만, 태평양 건너에 있는 미군들이 한국군 희생자에 비해 27%나 희생을 당한 것은 정말 죄송하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왜 그들이 그 많은 희생을 각오하고 한국전에 참전했는가? 자유 민주주의와 한국의 50만 기독교 신자들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고 교회가 부흥하였는데, 거룩한 사람들을 김일성에게 내어줄 수 없었던 것이다.

    급하게 징집된 한국군은 총도 제대로 쏘지 못하고 죽어갔다. 그들은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최전선에 보내졌다. 어느 가정에서 아내가 임신한 것을 보고 그 남편이 전쟁에 징집되었다. 그는 5개월 만에 가평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도 정확하지 않고, 그 때는 온 나라가 정신이 없었다. 세월이 흘러 유복자 아들은 어느덧 노인이 되었다. 2008년에 그 부친의 유해가 발견되었다. 58년 만에 부친의 유해가 아들에게 전달되었다. 그는 아버지의 유골을 받는 순간에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는 것 같은 충격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온 몸이 전율했다. 평생을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아버지라고 불러보지도 못하여 한이 맺혀 있었는데, 그 부친의 유골을 받으면서, 그는 “나도 아버지가 있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 아내와 아기를 둔 일등병이 총을 맞고 죽어가면서, 얼마나 고향으로 달려가고 싶었을까? 아내와 아기의 얼굴이 어른거려 눈을 제대로 감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생사를 알 수 없었던 그 부인과 아들의 평생은 또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이렇게 뼈아픈 비통함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 후손들은 잊지 말아야 한다. 결코 그 슬픔의 시간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저의 아버지는 상이군인이 되었어도 죽지 않고 살아오셨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는 행운아라고 생각한다. 그 때 우리 아버지가 전사하셨더라면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고, 나의 두 딸도, 네 명의 손자들도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도록 하시려고 섭리 가운데서 우리 아버지를 살려주셨다.

    심장 근처에 총을 맞고 야전 병원에 시체처럼 던져졌던 군인을 하나님이 살려주셨다. 그리고 영등포 원호(보훈)병원에 누워서 눈을 뜨면 봄이고, 다시 눈을 뜨면 가을이었다고 한다. 죽은 것이나 진배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퇴원한 후에도 재발하면 수술을 다시 받았다. 일곱 번이나 수술을 받았으니 몸은 흉터 투성이였다. 공중 목욕탕에 가기를 꺼려하셨다. 아버지가 49에 돌아가셨으니, 그래도 나는 아버지와 함께 24년을 살았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면서 살았다. 그러나 아버지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고 아버지를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세계 복음의 사명자들

    우리의 아버지와 아들들이 피 흘리면서 지킨 이 나라가 아닌가? 우리는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고 애국해야 한다. 우리가 얻어낸 자유 민주주의를 끝까지 수호해야 한다. 지금도 공산, 사회주의자들은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러시아 대통령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침략하고 자기 나라 군인들 50여만 명이 사상자가 되게 했다. 또 상대방 나라인 우크라이나의 군인들도 그 만큼 죽었을 것이 아닌가? 이러한 사탄의 지팡이로 살고 있는 독재자들이 있다. 세계 마지막 아마겟돈 전쟁에도 독재자들을 악한 사탄이 조종할 것이라고 성경은 예언하고 있다.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계16:13).

    “세 영이 히브리어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계16:16).

    우리는 정신적으로 무장하고 있어야 한다. 항상 정치인들과 국군장병들과 자녀들을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한다. 이 나라의 자유와 기독교 신앙을 지키는 파수꾼으로 살아야 한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자기 민족 이스라엘만을 위하여 예언한 인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비롯한 인근의 여러 나라들, 장차 올 세계 여러 나라들을 위하여 예언하도록 하나님이 선택하셨다.

    우리도 어떤 면에서는 여러 나라에 복음을 전하는 영적 선지자들이다. 이 세대의 풍습을 따르지 않고, 지금 이 시대를 영적으로 분별해야 한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실 때 전도하고 선교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교회를 위하여 더욱 봉사해야 한다.

    지금은 하나의 나라와 관계하는 시대가 아니다. 전쟁을 하여도 같은 사상을 가진 나라들끼리 연합한다. 미국을 위시한 유럽 전체 나토 국가들과 러시아가 지금 전쟁 중에 있지 않는가? 러시아의 배후에는 중국과 북한과 그들을 동조하는 벨라루스와 같은 공산주의 나라들이 있다. 하나님과 교회를 대적하는 악한 독재자들과 자유를 부르짖는 나라들과 전쟁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악한 사탄의 지배를 받는 자들과 성령의 지배를 받는 자들 간의 전쟁이다. 바로 그 전쟁이 지구 역사의 종말에 있을 아마겟돈 전쟁이다.

    그 당시 이스라엘을 침략하는 나라들은 북쪽의 나라들이었다. 아람, 앗수르, 바벨론 같은 나라들은 다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나라들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북쪽에서 기울어진 펄펄 끓는 가마솥을 보여주셨다.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끓는 가마를 보나이다. 그 윗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졌나이다”(렘1:13).

    하나님은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이스라엘의 주민에게 부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지금도 공산주의자들은 대부분 북쪽에 있다. 러시아 중국 북한, 그리고 중동에 있는 이슬람 국가들은 이스라엘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만약에 세계 전쟁이 중동에서 일어난다면, 북쪽에 있는 이러한 나라들의 연합국이 이스라엘과 기독교 나라들을 치게 될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호국 보훈의 달에 하나님이 지켜주신 대한민국의 자유와 신앙을 더욱 굳세게 지켜나가야 한다. 그리고 세계 전쟁에 대한 말씀을 늘 기억하고 예레미야와 같이 눈물로 국가와 교회와 후손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할 것이다. 세상 물질과 쾌락을 따라가다가 졸지에 환난이 오면 그 고난을 어찌 감당할 것인가? 항상 믿음으로 준비하고, 열 처녀가 기름과 등을 준비하고 신랑을 기다리듯이 우리는 재림하실 예수님을 고대하고 있어야 한다.

  • 06.02요 6:22-59그리스도는 생명의 떡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

    오병이어의 기적은 사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 되심을 나타내는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사복음서 기자 중에서도 유독 요한이 가장 상세하게 이 사건을 기록하였다. 유월절과 관련이 있는 사건이고(4절), 빌립에게 주님이 말씀하셨다는 것과 안드레가 한 아이의 음식을 예수님께 드렸다는 것은 다른 기자들이 기록하지 않은 부분이다. ‘누가’는 그 지역을 ‘벳새다’ 들판으로 기록하고 있고, 요한은 갈릴리 바다 건너편의 산으로 기록하고 있다(눅9:10, 요6:1-3). 벳새다는 갈릴리 호수 북쪽이다. 벳새다(βηθσίδα)는 어부의 집이란 의미다. 예수님의 세 제자 안드레, 베드로 빌립은 이 지역 출신이다. 호수를 배경으로 넓은 초지 들판이 형성되어 있어 많은 군중들이 앉아서 주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이고, 주님은 조금 높은 언덕에서 말씀하신 것 같다.

    요한복음 6장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이신 것을 밝히는 내용이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생명의 떡에 대한 말씀은 유대인의 유월절 절기에 맞추어진 메시지이다. 유월절에 희생양을 잡아서 먹고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었다.

    “이 달 열나흗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출12:6-8).

    그들은 유월절의 해방과 자유를 누리면서 장차 메시야가 와서 희생양이 되시고 생명의 떡이 되므로 인류의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약 천사백 년 동안 그들을 구원해 주실 메시야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런데 마침내 그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 땅에 찾아오신 것이다.

    그 분은 광야의 양식 ‘만나’와 같이 하나님 백성들의 양식이 될 것이고, 유월절 절기에 먹었던 ‘무교병’처럼 순수한 떡이 될 분이었다.

    그 당시 주님을 따르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궁핍한 문제를 해결해 주실 유대의 왕이 마침내 왔다고 생각했다. 주님이 진정으로 정치적인 왕이 될 심산이었다면, “내가 너희들의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 로마로부터 압제받는 고통과 가난을 이해한다. 앞으로는 배고프지 않도록 양식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억지로 임금 삼으려 하는 자들을 피하여 산으로 떠났다(15절). 오병이어의 기적은 배고픈 군중들을 일시적으로 배부르게 하였지만, 육신을 위한 양식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아마 그랬다면 지속적으로 양식의 문제를 해결하였을 것이다. 육신을 위한 떡의 문제나 경제적인 문제에 중점을 두지 않으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26,27절).

    나는 생명의 떡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의 떡이기 때문에 십자가에 희생하게 될 자신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54-56절).

    주님을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그 분은 생명을 먹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킬 때 희생양과 무교병을 먹지 않았는가? 음식을 먹어 새 힘을 얻듯이 예수님의 생명을 먹어야 산다고 말씀하셨다. 생명의 부활로 일어나려면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들어와야 한다.

    “나의 살과 나의 피”(ή σάρξ μου...τό αίμά μου: 헤 살크스 무 ... 토 하이마 무)를 먹는다는 말씀에 대하여 그 시대 사람들은 대단히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식인종도 아니고 어떻게 사람의 살과 피를 먹을 수 있는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여기서 먹는다(τρώγων: 트로 곤)는 것은 하나가 된다 동화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주님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한다”(56절)고 덧붙여 설명하고 있다. 주님과 우리와의 영적 합일을 뜻한다. 이것은 거듭난 영적 체험을 하지 않은 사람은 쉽게 이해할 수 없다. 정말 주님이 나와 일체가 된 것인지 당사자 본인만이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살과 피를 마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신 그 생명 자체를 믿고 수용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도 죽었고,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생명의 떡을 먹으므로 산다는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광야의 만나는 그리스도의 상징적인 떡에 불과했지만, 이제 진짜 생명의 떡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48-50절).

    본문은 예수님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란 표현을 6번이나 반복하여 기록하고 있다. 52절에 의심하는 유대인들은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고 말하였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살을 찢어주시고 피를 흘려주셨다. 죄인인 인류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게 하신 것이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십자가의 희생을 구원의 원리로 받아들이는 자는 구원을 받겠지만,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지 못하는 자, 즉 십자가의 희생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자는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 그 당시의 제자들도 이 말씀의 진리가 이해하기 어려웠다(60절). ‘어렵다’는 헬라어 ‘스클레 로스’(σκληρός)는 “비난을 내포한 말”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엉뚱한 소리”를 뜻하는 단어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희생된 후에 일어난 주님의 부활로 인하여 제자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마셨다는 말씀을 이해하였다. 지금도 불신자들은 이 말씀이 이해되지 않을 뿐 아니라, 말도 안 되는 엉뚱한 소리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자기들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군중들을 선동하다가 로마의 반역자로 사형당한 것이 자기들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고 말할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고 말씀하였다.

    생명의 떡을 먹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인가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바로 인간이 찾는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다. 경제 문제나 농업이나 양식의 문제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진리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인류에게 생명의 떡이 된다고 직설적으로 말씀하셨다. 그 방법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게 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그를 믿는 자들에게 죄에 대한 죽음과 새생명의 부활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생명의 떡(35,48절), 하늘로부터 내려온 떡(41절), 하늘로부터 내려온 산 떡(51절)이라고 여러 번 강조하셨다. 우리말은 떡보다 밥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밥이 생명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자신의 몸과 영혼을 자기 백성의 밥으로 제공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깨닫기 원하는 진리의 핵심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51절).

    그럼 어떻게 생명의 떡인 예수 그리스도를 먹을 수 있는가? 예수님과 영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은 예배를 통하여 만날 수 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예배 시간에 성찬식이 있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라”고 하였다(55절). 그리스도 협의회 교단은 매 주 예배 시간마다 성찬식이 있다. 성찬을 먹지 않을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찬송과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강조해야 한다. 주일예배를 통하여 말씀의 은혜가 충만해야 한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바울 사도는 말씀하셨다(롬8:9).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인도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라면, 그는 생명의 떡을 먹은 사람이다. 그리고 실제로 기도를 하든지 찬송을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의 양식인 줄 알고 항상 읽고 묵상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과 삶이 예수님을 그대로 닮아 있어야 예수님과 하나가 된 사람이다. 예수님이 좋아하시는 말과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저 사람을 보니 예수님이 생각난다”고 할만큼 경건한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 4장에서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항상 기뻐해야 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관용해야 하고,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감사함으로 기도해야 한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빌4:8,9).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믿지 않은 사람들은 생명의 떡을 먹지 않은 자들이다. 그들의 영생보다도 지상에서의 풍족한 양식과 정치적인 안정을 요구하였다. 죄로부터의 구원보다도 육신적인 만족과 자기 행복을 추구한다. 그 대표적 인물이 가룟유다이다.

    그는 유다의 정치적인 메시야를 원하였고, 가난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 있는 왕을 기대하였다. 그리스도가 생명의 떡인데, 그 본질은 무시하고 세상의 물질과 명예와 지위를 추구하였던 것이다. 인간이 먹어야 하는 생명의 떡을,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주님은 그런 사람을 마귀라고 불렀다. 그 정신세계의 아비가 마귀(διάβολος : 거짓 비방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가룟유다를 마귀라고 말씀하셨다(71절). 생명의 떡을 먹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먹지 않는 자는 마귀의 종이 된다. 생명의 떡을 먹는 자는 영생을 누리지만, 그렇지 못하면 영원히 멸망하게 된다. 우리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그 주님과 하나가 되자. 그 주님이 바라시는 대로 사는 경건한 사람이 되자.

  • 05.26요 5:1-18베데스다의 38년 된 병자

    찾아오시는 주님의 은혜

    예수님이 명절이 되어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가 양문 곁에 있는 ‘베데스다’의 못 행각에 누운 자들을 보셨다. 거기에 있는 38년 된 병자를 불쌍히 보시고 고쳐주셨다. ‘베데스다’(Βηθεσδά)는 ‘자비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베이드’(תיב)와 ‘헤세드’(דסח)의 복합어이다.

    거기에 행각 다섯이 있었고 그 안에 많은 병자와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혈기 마른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거기서 가끔 병을 고치는 기적이 일어났다. 천사가 나타나 물을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가 병 고침을 받았다. 신기한 기적이 소문을 타고 병자들에게 전해졌고 병을 가진 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기적의 혜택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이었다. 사실 38년 된 병자는 스스로 일어나기도 쉽지 않았으므로 백 년이 가도 그 못에 먼저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오늘의 시대도 사람들이 베데스다 못 가에 누워있는 것처럼, 문제를 안고 해결받기를 희망하고는 있지만 해결은 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자들이 너무나 많다. 거기는 자비의 집이었지만, 선착순 한 사람만 혜택을 받는 사실상 자비가 없어 보이는 무한 경쟁만 존재하는 곳이었다.

    38년 된 병자가 누워 있는 것으로 보아 병이 중하였고 마음대로 걷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예수님은 거기 있는 많은 환자들 가운데 하필 그 사람을 눈 여겨 보시고 그를 긍휼히 여기셨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6절)라고 기록되어 있다. 주님께서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이다. 38년 동안 병들어 있었으니 얼마나 그의 삶이 고달프고 한탄스럽겠는가? 행복한 가정생활도 없었고, 살아갈 희망조차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하루하루 목숨만 지탱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날 주님이 그에게 가까이 찾아오셨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6절)라고 물으셨다. 그 사람이 가장 듣고 싶은 말씀이었다. 주님이 그를 치료해 주시려고 물으셨다. 주님이 그냥 낫게 하실 수도 있지만, 굳이 물으신 것은 그 사람이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주님이 치료하실 능력이 있지만, 그가 믿지 않으면 치료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자기에게 말씀하는 분이 전능하신 예수님이신 줄 알지 못하였다(13절). 만약 알았더라면 “예, 낫고자 합니다. 제발 저를 이 병에서 고쳐주십시오”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는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갑니다”(7절)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이 베데스다 행각에 얼마나 있었는지는 모르나 아마 상당한 시간을 기다리면서 세월만 허송하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은 잘 움직일 수 없는 병이므로 오래 머문다 하여 병 고침의 기회가 오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소문을 들은 병자들만 자꾸 모여들었으니 자신은 아무리 기다려도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천사가 물을 움직일 때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치료를 받는 것도 하나님의 기적이다. 세상에서도 이렇게 희귀하게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병 고치겠다고 자꾸 모여들고, 천사가 물을 움직일 때는 서로 들어가려고 난리가 난다. 오늘날 무한 경쟁의 사회와 다를 바 없다. 무력하게 누워있는 38년 된 병자에게는 거기서 병 고침의 기적을 체험하기는 불가능하다. 스스로 못에 들어갈 힘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끔 이 병자와 같이 “나는 안 돼, 나는 힘들어”하고 자포자기하거나 단념하고 살아갈 때가 있다. 세상 원리로 안 되는 일도 주님이 찾아오시면 해결될 수 있다. 나를 불쌍히 보시는 예수님을 만나면 문제가 해결된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한다.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일꾼의 비유에도 보면, 저녁 시간까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마냥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직장도 결혼도 안정된 생활도 “언젠가는 이루어질 거야”하고 마냥 기다리고만 있는 인생이 있다. 포도원 일꾼 비유에 그 사람은 오후 5시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6시가 되면 하루가 끝난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이 그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자에게 일을 맡겨주었다(마20:1-16). 그리고 일찍부터 부름을 받은 다른 사람들과 똑 같이 하루 일당인 일 데나리온을 주었다.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어쩌면 자기에게 기회가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38년 된 병자에게, 어느 날 뜻밖에 전능하신 예수님이 찾아온 것이다. 이것이 기적이고 행운이 아닌가? 오늘 이와 같은 복이 우리에게 찾아온 것이다. 인생의 여러 문제로 고민하고 죽음을 해결하지 못한 우리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이다.

    그가 먼저 문제를 해결받기 위하여 자원하여 주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다. 주님이 먼저 그에게 찾아가신 것이다. 그래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찾아오신 것이 놀라운 은혜다(요일4:10).

    아담 부부가 범죄했을 때 하나님이 먼저 에덴동산에 오셔서 아담을 부르며 찾으셨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바울도 하나님이 먼저 찾아가셔서 그들을 불러 주셨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원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예수님이 하늘의 보좌에 앉아만 계시고 죄인들을 호통 치신 것이 아니라, 땅에 사는 추하고 악한 인간을 찾아오셨다. 주님의 낮아지심과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마음이 우리를 구원하게 된 것이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7,8).

    38년 된 병자는 자기에게 더 이상의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 병자에게 기회가 온 것이다. 그 많은 병자 중에서 유독 예수님이 그에게 관심을 가지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인 것이다. 세상에 문제 있는 수십 억의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주님이 찾아오셨다는 것이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이 찾아오시면

    우리는 38년 된 병자와 같이 무턱대고 누워서 요행만 바라는 사람은 아닌가? 누군가를 의지하고 도와줄 자가 없다고 한탄하고 있지는 않는가? 전능하신 주님, 문제 해결자이신 예수님을 만나려고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아프리카 우간다 선교의 이야기를 같은 노회에 있는 충인교회 강영국 목사님에게 들었다. 그들은 너무 가난하여 마치 38년 된 병자와 같이 자기들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국민들이 많았다. 어느 날 주님이 그들을 불쌍히 보시고 대한민국 교회와 선교사들을 붙여주셨다. 그들의 소원이 시멘트로 지은 교회당을 갖는 것이었다. ‘유니온 비전’선교회가 우간다 목회자를 수 천 명씩 모아놓고 성경 컴퍼런스를 열고 그들 중에 우수한 성적으로 공부하는 목사님에게 예배당을 지어준다. 약 1만 달러면 2-3백 명이 들어갈 수 있는 보통 예배당을 하나 짓는다고 한다. 그들에게 땅을 사게 하고 진흙으로 벽돌을 만들게 하며, 먼저 그들의 교회 성도들이 헌신하게 하고, 그 다음에 건축 자재와 건설 인부의 임금을 한국 교회에 헌신된 신자들이 헌금을 하게 한다. 지금 우간다는 기독교 신자가 72%이다. 대통령도 신앙이 좋다고 한다. 아프리카는 동성애 문제나 에이즈가 심각하다. 미국의 대통령이 동성애를 찬성하면, 에이즈 치료약을 주겠다고 말하였지만, 우간다 대통령은 동성애는 하나님이 매우 싫어하시는 죄이므로 허락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자기들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의 교회를 통하여 1800개의 교회당뿐만 아니라, 학교와 병원도 짓게 하신다. 마치 우리나라의 130년 전에 서방 선교사들이 와서 한국교회를 일으킨 것과 같은 성령님의 역사가 거기서 강력하게 일어나고 있다.

    주님이 찾아오시면 불가능한 일이 기적 같이 이루어진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한 바울의 고백이 오늘 선교의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다.

    병 치유를 곧바로 선포하신 주님

    주님이 이 병자를 고치신 방법은 그 환자가 생각한 방법이 아니었다. 그의 방법은 천사가 물을 동하게 할 때에 먼저 못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단지 말씀 한 마디로 그를 고쳐주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8,9절).

    우리는 세상의 수단과 방법에 의지하거나 혹시나 모르는 우연에 의지하려고 한다. 주님이 사랑하시고 감동하시면 병 고침뿐만 아니라 인생의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언제든지 주님이시면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예수님은 그에게 실망하지 말고 천사가 와서 물을 동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내가 함께 있다가 물이 동하면 당신을 못에 넣어주겠다고 말씀하시지도 않았다. 주님은 곧바로 그의 병이 나았다고 선포하시고 침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하셨다.

    전능하신 주님은 말씀으로 그를 고쳐주셨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의 문제를 말씀으로 해결하신다. 자신의 경험이나 세상의 수단과 방법에 의지하지 말고 주님을 굳게 믿고 순종하라. 주님이 긍휼히 여기시고 주님이 말씀하시면,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에게도, 은총의 기회가 찾아온다.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없다고 낙심한 자에게도 기적이 일어난다.

    요셉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 아무도 이방 노예를 구해줄 자가 없었다. 자기가 의지했던 주인 ‘보디발’이 그를 감옥에 넣었으니 아무도 그의 석방을 위하여 힘을 쓸 자가 없었다. 그에게는 아무런 권력의 끈도,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물질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석방의 기회가 왔던 것이다. 애굽의 최고 권력자인 바로 왕이 요셉을 왕궁으로 불러들임으로 석방의 기회가 찾아왔다. 어느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있다면 언제든지 기회는 있다. 질병뿐 아니라 어떤 어려운 문제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에게 집중하시고 다가오시면 해결 받을 수 있다.

    이방 땅 ‘그랄’에서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여동생이라고 거짓말을 하여 그 지역 왕에게 아내를 빼앗겼을 때, 아무 방법이 없었다. 남편으로 그처럼 무력하고 비참한 일이 없었다. 아브라함으로서 아무 방법과 길이 없었을 때에 하나님이 왕의 꿈에 나타나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도록 하여 아내 사라를 찾아주셨다. 우리는 ‘혹시나’ 하는 우연을 기다리고 있는 자들이 아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다. 우리는 주님께 지금 곧 바로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자들이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언제나 도움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있다. 쉬지 않고 기도하여 하나님이 감동하시도록 순종해야 한다.

    모든 이에게 구원과 자비를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이다. 그런데 행각 다섯 개 밑에 누운 그 많은 병자들에게 모두 자비가 베풀어지지 않았다. 천사가 물을 동하게 할 때에 제일 먼저 물에 들어가는 자만 치유를 받았다. 자비의 집에는 모든 환자들에게 고루 나누어 줄만큼의 충분한 은혜와 자비가 없었다. 천사가 물을 움직인 후, 오직 베데스다 못에 먼저 들어가는 한 사람만 자비를 입을 뿐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다. 38년 된 병자의 사정을 아시고 그에게 직접 은혜를 베푸셨다. 전지전능하신 주님은 그 사람의 고통과 형편을 다 알고 계셨다. 너무 오래 동안 기다리고만 있었던 그에게 치유와 사랑의 손을 내미셨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6절).

    그 환자는 더 이상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거나 누군가의 도움을 바랄 필요가 없었다. 예수님께서 그를 불쌍히 보시고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하셨다. 걸을 수 없었던 그는 곧 일어나 걸었다. 자기의 침상을 들고 갈 정도로 힘이 생겼다.

    예수님의 치유는 단순히 환자의 병만 고치신 것이 아니다. 장애로 인한 상처 입은 마음과 함께 그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전인격적으로 치료하셨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그 한 사람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셨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의 영혼과 육신을 전인격적으로 치료해 주신다. 태양의 광선과 같이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구원의 빛을 비추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자는 영적으로 거듭나며 큰 기쁨과 만족을 누리게 될 것이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4:2).

  • 05.12신 5:16부모 공경과 복

    자녀가 마땅히 할 일

    어버이주일을 맞이하여 부모님을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감사를 드리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시면서 두 번이나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성경 여러 군데서 부모 공경과 순종을 강조하고 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16절).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

    출애굽기 20장 5계명과 비교하면 신명기의 5계명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라는 말과 “복을 누리리라”는 말이 더 추가되었다. 부모 공경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임을 강조하고 있다. 세상에서의 법도 우리가 준수해야 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명령은 반드시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부모 공경은 형편과 사정에 따라 자녀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으로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다.

    부모는 자기 형편과 사정에 따라 공경할 수도 있고, 모른 척할 수도 있는 분이 아니다. 생명을 주신 분이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자녀를 낳아 양육해 주신 분이므로 마땅히 효도하고 공경해야 한다. 아들이든지 딸이든지 부모의 노후를 모셔야 할 처지이면 불평 없이 감사함으로 모셔야 한다. 요즘은 연세가 많은 부모를 요양원에 맡기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런데 문제는 요양원에 들어가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15여년 전만 해도 “부모를 누가 모셔야 하는가?”라고 질문을 하면 장남이나 자녀들이 모셔야 한다는 대답이 많았다. 그런데 최근에 같은 설문조사를 하여 “부모를 누가 모셔야 하는가?”라고 물었더니, 국가나 사회가 모셔야 한다는 대답이 50% 이상 나왔다고 한다. 앞으로 점점 자녀들이 부모를 모시지 않으려 할 것이다. 부모들은 자식 키우느라 수고를 했지만, 노년에는 외롭게 따로 살아야 할 처지이다.

    부모는 우리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분이다. 그 자체만으로도 감사하고 공경해야 한다. 생명을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 생명을 잉태하여 태어나게 하는 일은 부모가 한다. 그래서 부모는 생명 출산에 대하여 하나님의 대리자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격 여부를 떠나 ‘경외해야 할 분’이다.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라”(레19:3).

    경외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그러나 경외의 대상에 한 분의 예외가 있는데, 바로 부모다. 부모의 위상을 이렇게 높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때에 그 부모와 함께 일하셨기 때문이다. 생명을 잉태하고 낳았다는 그 점에서는 그 자녀가 부모를 경외해야 하는 것이다. 부모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므로, 자격을 논해서는 안 된다. 나에게 잘 해 주면 부모를 공경하고, 못했으면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에게 버림을 받은 한 아이가 있었다. 그는 태어나자 말자 베이비 박스에 버려졌다.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부모가 있는 유복한 아이들이 괜히 미워서 때려주었다. 그는 비행 청소년이 되어 비뚤어진 생활을 하였다. 폭력을 일삼고 온갖 죄를 지었다. 결국 교도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거기서 예수님을 믿고 목사님에게 자기도 올바른 사람이 될 수 있는지 물었다. 늘 부모에 대한 원망과 미움에 가득 차 있었다. 목사님은 “널 버린 부모라도 미워하지 말고 감사하라. 그 부모님이 계셨기 때문에 오늘의 당신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권면하셨다. 그는 마음을 바꾸고 누군지도 알 수 없는 부모에 대한 원망과 미움을 버리고 자기가 태어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사회에 나가서 잘 적응하기 위하여 먼저 대학 검정고시를 준비하여 시험에 합격을 하였다고 한다. 친부모가 없는 고아라도 결혼을 하면 장인 장모가 생길 수 있다. 친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신앙 있는 장인 장모를 주실 것이다.

    부모가 없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며, 하나님도 사랑할 수 없었고 가족과 이웃도 사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님은 하나님 다음으로 소중한 존재이다. 그런데 말세에는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부모를 거역하게 된다고 말씀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딤후3:1,2).

    감사하고 기쁘게 해 드려라

    부모 공경은 우선 부모님에 대한 감사를 해야 한다. 우리는 사랑의 빚을 많이 진 자들이다. 독생자를 보내셔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빚은 물론이고,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의 빚도 많다. 시인 ‘바이런’은 “인생은 어머니의 가슴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부모로부터 자신의 생명이 시작되었으니 항상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를 해야 한다. 부모의 수고와 눈물과 정성의 터 위에서 우리가 성장한 것이다.

    부모는 우리가 실수하고 잘못을 했어도 자신의 잘못으로 알고 용서해 주신다. 탕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 형은 아버지의 재산을 다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에 대하여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받아들였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눅15:24).

    중국 고사에 “반의지희(班衣之戱)라는 말이 있다. 춘추전국시대에 유명한 효자였던 ‘노래자’라는 사람이 나이 70에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려고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부렸다는 말이다.

    고부간에 갈등을 심하게 겪는 딸이 친정 어머니에게 찾아와 설움을 호소하였다.

    “어머니 에덴동산을 왜 낙원이라고 말했는지 알만 합니다. 거기에는 시어머니가 없었거든요.”

    현명한 친정 어머니는 자기 딸에게 시어머니에게 사랑 받는 비결을 알려주었다.

    “얘야 시어머니를 밉다고 생각지 말고 사랑받을 방도를 생각해라. 노인들은 아이처럼 늘 맛있는 것을 먹고 싶어 하지. 그러니 네가 매일 맛있는 음식을 정성껏 만들어 드려라. 그러면 칭찬받을 일이 많아질 거야.”

    그 딸은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순종하였고, 시어머니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자주 해 드렸다. 그랬더니 며느리를 대하는 시모의 태도가 부드럽게 변했다. 그리고 칭찬 듣는 회수가 많아졌다. 며느리도 시모에 대한 미움이 사라지고 오히려 효부로 소문이 났다. 지혜로운 어머니의 충고 덕에 딸을 효부로 만들었다.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잠10:1)고 하셨다. 아기 때는 밥 잘 먹고 잠 잘 자면 부모의 마음이 기쁘다. 학교 다닐 때는 열심히 공부하면 부모의 마음이 기쁘다. 가장 부모를 기쁘게 하는 것은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이다.

    친 부모이든 시부모이든, 장인장모든지 살아 계실 때 잘 모시고 효도하기 바란다. 이런 옛 싯구가 있다.

    “어버이 살아 계실 때 섬기길 다하여라. 지나간 후에 애달프다 어이하리. 한 평생 고쳐 못할 일 이뿐인가 하노라.”

    우리가 철이 들어 부모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쯤이면 부모는 이미 하늘나라에 계신다. 효도와 부모 공경은 미루는 것이 아니다. 지금 오늘 실천해야 한다. 자주 전화를 올리고, 용돈도 드리고, 할 수 있는 대로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한다. 여러분들은 주님 안에서 효자 효녀 효부 효사위들이 다 되기를 바란다.

    공경하고 순종하라

    ‘공경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카베드’인데 이 말은 무겁게 여긴다는 것이다. 부모를 그 누구보다도 귀하고 비중 있는 분으로 생각해야 한다. 또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우리가 잘못을 범할 때 책망도 하고 매도 때릴 수 있는 분이다. 부모를 공경하면 야단이나 징벌도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부모가 책망할 경우에라도 잘 수긍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부모 공경이 부모를 우선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마음이라면, 그 마음이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 순종이다. 부모가 높고 중요하신 분이라고 생각한다면 부모가 말씀하면 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6:1).

    부모의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은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한다. 말로만 부모의 은혜에 감사한다고 하면서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속을 상하게 하면 그것은 공경한다고 말할 수 없다. 순종하는 것이 부모를 기쁘게 하는 것이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골3:20).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께 십자가를 지기까지 순종하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고 십자가의 모진 고난을 받으셨다. 그리고 그 동안 육신의 부모였던 요셉과 마리아에게 순종하시면서 목수의 일을 성실하게 하셨다. 십자가상에서도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모친 마리아를 부탁하면서 “요한아 이제부터 네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죽는 순간까지 어머니를 사랑하고 보살피려 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순종을 본받아 부모님의 말씀에 잘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어릴 때뿐만 아니라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그 자식이 잘 되도록 권하신다. 그러므로 부모의 말씀에 순종하면 이 세상에서도 잘 되는 복을 받는다(엡6:3).

    옛말에 “부모 말을 잘 들으면 자다 가도 떡이 생긴다”는 격언이 있다. 부모의 말에는 인생 경험이 풍부하다. 그래서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실수와 시행착오가 그만큼 줄어든다. 그리고 부모에게 효도한다는 소문이 있으면 이웃 사람들이 또한 칭찬하게 되니 세상에서도 인정을 받는다. 이거야 말로 꿩 먹고 알 먹는 격이 아닌가? 자신의 부모에게 효도하고, 이웃에게 칭찬을 듣고 하나님께 복을 받으니 부모 공경의 도리를 다하는 것은 복을 다발로 받는 것이다.

    부모 공경으로 인한 복

    부모 공경을 실천하면 이 땅에서 장수하고 복도 누린다. 1,2계명을 말씀하신 후에도 복을 약속하셨고, 5계명을 말씀하신 후에도 복을 약속하셨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장에서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하셨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6:2-3).

    바로 그 약속이 “잘 되고 장수하는 것”이다. 부모 공경의 복이 생명이 길어지는 것은 부모는 생명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생명을 주신 분에게 공경하고 효도하면 서로의 생명이 길어지게 된다. 그러나 생명을 주신 분에게 감사하지도 않고 공경하지도 않는다면, 서로의 생명이 단축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를 공경하는 가정에는 조부모도 장수하고 부모도 장수하고 본인도 장수하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부모를 경홀히 여기고 공경하지 않는 가정은 부모도 자신도 단명할 수 있다.

    효도하면 장수하는 것은 왜인가? 우선 효자 집안에 효자가 난다고 하였다. 아버지가 효자이면 그 아들도 본을 받아 효자가 된다. 아들이 효자이면 손자도 효자가 되는 것이다. 그 후손들이 부모를 공경하고 효를 다하면 그만큼 노부모는 마음이 편할 것이고 마음이 편하면 장수하게 되는 것이다. 집안이 화목하고 건강하면 그 집안 식구들은 장수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복은 심는 대로 거두게 하신다. 생명을 주신 부모에게 잘 하면 생명이 길어지는 것이다.

    세상에서 잘 되는 복을 받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부모님을 공경하게 되면 그 영혼이 복을 받는다. 신명기 5:16의 “여호와 하나님이 너에게 주신 그 땅 위에서 너의 날들이 길고 너를 위하여 잘 되게 하실 것”이란 원어를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로 번역하였다. 하나님이 주신 그 환경과 직장과 가정에서 사는 날이 길어지고 복을 받는다고 하였다.

    “잘 되게 한다”는 말은 ‘야타브’(בטי)란 동사인데, “하나님의 은총을 입는다, 잘 된다, 기뻐한다”는 복합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3에서 신명기 5:16을 인용하면서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로 정확하게 번역하였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 은총을 입으면 자동적으로 육신적인 일도 잘 풀리게 된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고 믿음으로 성실하게 살면 사람이 살아가면서 필요한 모든 것도 풍족히 받게 된다. 영적인 복 안에 육신적인 복이 포함되어 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1:2).

    모태 신앙인 자는 부모보다도 예수님을 더 잘 믿고 구원에 이르게 되면 최고로 부모를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다. 불신 부모를 둔 사람은 그 부모를 전도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면 가장 큰 효도를 하는 것이다. 모태 신앙인 자로서 최고로 부모를 기쁘게 해 드린 사람은 모세와 다윗일 것이다. 그들은 부모보다도 더 큰 믿음의 역사를 남겼다. 불신 부모를 둔 대표적 인물은 기생 라합일 것이다. 라합은 이스라엘이 공격하면 여리고 성이 무너질 줄 믿고 부모와 친척들을 안전하게 자기의 집에 모셨다. 결국 라합의 믿음으로 그 부모와 친척들을 칼날의 위험이 없는 안전지대로 옮겨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정탐한 젊은이들이 들어가서 라합과 그의 부모와 그의 형제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고 또 그의 친족도 다 이끌어 내어 그들을 이스라엘의 진영 밖에 두고”(수6:23).

    라합은 살몬과 결혼하여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모압 여인 룻과 결혼하여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다. 믿음의 여인 라합은 다윗 왕가의 조상이 되는 큰 영예를 얻었다.

    성경에서 부모 공경과 효도를 제일 잘 한 사람 중 하나가 ‘나오미의 자부 룻’이다. 룻은 완전히 망한 시어머니 나오미를 모시고 유다 땅 베들레헴까지 왔다. 땅도 과거에 모압으로 이주하면서 처분하였고, 재산은 망했으니 당연히 없고, 그리고 자식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에게 하나님 신앙을 전수해준 시모 ‘나오미’를 사랑하여 모시기로 작정했다. 보리밭에 나가 이삭을 주워 시어머니에게 식사를 제공했다. 어디 그 뿐이었겠는가? 살림을 살려면 돈이 있어야 하고, 룻은 유다 땅에 와서 살아보려고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룻의 아름다운 신앙과 효성을 보시고, 그에게 복을 주셨다. 여자에게 최고의 복을 남편을 잘 만나는 것이다. 베들레헴의 유지인 ‘보아스’가 룻을 사랑하게 되고 아내로 맞이하였다. 성경이 말하지는 않지만 아마 보아스는 그 때까지 결혼을 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결혼한 아내와 사별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룻은 대가 끊어진 집안을 새 남편 보아스로 인하여 전 남편 ‘말론’ 집안의 명예를 살리고(룻4:10) 과거 시아버지 ‘엘리멜렉’의 땅을 보아스가 다시 사 주었다. 그리고 보아스의 씨로 아들 ‘오벳’을 낳았다. 오벳(דבוע)의 뜻은 ‘경배자’, ‘종’이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가 되라는 경건한 이름을 붙여주었다. 오벳이 결혼하여 이새를 낳고, 이새가 다윗을 낳았다. 그러므로 오벳은 다윗의 조부가 된다. 룻은 다윗 왕가의 증조 할머니가 되었다. 하나님께 선택된 유다 민족이 된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다윗 왕가의 조상이 되는 명예를 얻었다.

    룻은 남편이 죽고 경제적 어려움과 슬픔 가운데서도 시어머니를 끝까지 잘 모시므로 엄청난 복을 받았다. 양가 부모님을 공경하고 효도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룻과 나오미에게 준 것과 같은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위로부터 내리는 영적인 복과 땅에서의 건강과 명예와 물질적인 복까지 다 함께 한 세트의 복을 주실 것이다.

  • 04.28요 1:19-34세례요한의 증언

    예수님 증언자는 겸손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거듭나고 새사람이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고, 그러므로 예수님이 인류의 구원주 되심을 세상에 널리 전도해야 한다.

    본문에 나오는 세례요한도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의 선지자들이 기다려 오던, 온 인류의 메시야라고 증언하였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인류의 구원주이시고, 세상의 죄를 지고 갈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언하였다. 우리가 예수님의 증언자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나를 드러내지 않고 예수님을 드러내야 한다. 내 중심으로 살지 않고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증언할 때에 자신은 겸손하게 낮추고 예수님은 지극히 높였다. 그는 선지자의 삶을 살면서 호의호식하지 않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로 살았다. 세례요한의 삶은 경건하고 검소하고 절제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세상 권력과 타협하지 않고 죄를 가까이 하지 않으려고 검소하고 절제된 생활을 했다. 낙타의 털옷을 입고 가죽 띠를 띠고, 먹는 식사도 산과 들에 있는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마3:4). 죄와 타협하지 않고 진솔하게 외치는 경건한 선지자였으므로, 그 당시 유대 군중들은 그를 존경하였고, 그의 설교를 들으려고 온 유대에서 그가 거주하는 곳으로 찾아왔다. 심지어 종교지도자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도 찾아와서 그에게 세례를 받기 원하였다.

    사람들은 세례요한이 혹시 메시야가 아닌가 오해했다. 그들이 기다려 오던 구원주 메시야인지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냐? 당신이 마지막 때에 온다는 그 엘리야 선지자냐?”라고 물었을 때, 그는 자기가 그리스도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니라고 하였다(19-21절). 단지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23절).

    그는 사실 예수님을 구주로 증언한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다. 그러나 그는 겸손하게 자신은 엘리야 선지자가 아니라고 말했다. 단지 메시야이신 그리스도의 신발끈을 풀기에도 감당할 수 없는 낮은 종이라고 고백하였다. 그 당시에는 주인이 집에 들어오면 종이 신발의 끈을 풀고 발을 씻어주었다.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27절).

    우리는 가끔 나를 드러내기 좋아하고 높아지기를 좋아한다. 말세가 되면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는” 지극히 이기적인 존재가 될 것이라고 바울 사도는 말씀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딤후3:1,2).

    그리스도의 증언자는 자기만 드러내는 자가 아니고, 겸손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높여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전하면서도 자신은 낮아지고 예수님은 높여야 한다. 세례요한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망하여야 하리라”고 고백하였다(요3:30). 삶 속에서 더욱 겸손하여 예수님과 그 말씀을 높일 수 있어야 한다.

    죄와 타협하지 말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게 하려면 담대하게 죄를 책망해야 한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수 없고 구원을 받지 못한다. 자신의 죄를 철저하게 고백하는 자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세례요한은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왔을 때, “독사의 자식들아, 회칠한 무덤과 같은 자들아 회개하라!” 소리쳤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고”(마3:7,8).

    다른 사람들에게 죄를 회개하라고 외치려면 먼저 자신부터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 세례요한은 그 당시 로마인들과 신앙적으로 타협하지 않고 경건하게 살려고 사회와 격리된 ‘에세네’파 단체에 소속이 되었을 것이라고 신학자들은 추측한다. 거기는 세례요한 세례를 베풀던 곳과 그리 멀지 않는 곳이었다.

    그는 세상 권력과 타협하지 않으려고 아주 검소하게 살면서 자연인처럼 살았다. 그러다 보니 그 당시 권력자와 지도자들이 세례요한을 두려워하였고 그의 전파하는 말씀에 존경심을 가졌다. 왕도 군중들을 의식하고 그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권력으로 압제하고 강포를 행하는 군인들, 세금으로 치부하는 세리들,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서로 속이고 가난한 자들을 등쳐 먹는 사람들을 향하여 세례요한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담대하게 회개를 외쳤다. 죄와는 타협이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회개하는 심령을 소유해야 한다.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는 죄 사함을 받을 수 없다.

    이번 4월 달 필리핀 고르도바 세미나에서 호세아서를 강해했는데, 그 지역 목사들이 은혜를 많이 받았다. 마지막 질문 시간에 한 남자 목사가 손을 들고 자기의 죄를 고백하였다. 자기가 고멜과 같이 하나님을 떠난 음란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세계를 위한 말씀교회’를 섬기는 ‘가니’(Gany) 목사는 자신이 목사의 아들이었지만 순종하지 않고 타락하여 본처를 두고 다섯 명의 여자와 살았다고 말했다. 마침내 회개하고 본처에게 돌아와 목회자가 되었다고 고백하였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이 되려면 우리 자신이 먼저 회개하고 죄를 멀리 해야 한다.

    “사람이 회개하지 않으면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시7:12).

    우리가 회개하지 않으면 이미 하나님이 당기려고 예비한 화살이 우리의 심장을 꿰뚫게 되리라고 말씀하였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고 왔다”(눅5:32)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회개하지 않는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 동네를 향하여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큰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마11:20).

    세례요한도 예수님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다(마3:2, 4:17). 천국(바실레이아: βασιλέια)의 원문은 ‘하나님의 왕국’이다. 하나님이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왕국의 백성이 되려면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분명히 알라

    세례요한은 자기가 소개하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자신은 감히 그 분의 신발끈도 풀 수 없는 비천한 존재인 것을 고백하였다. 하나님이 보내신 속죄 양으로 오신 분임을 알고 전파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29절).

    예수님이 구주이신 것을 믿지 않고 조롱하는 자들이 가끔 있다. 제3계명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 되이 일컫지 말라”고 하셨는데, 불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를 불신하고 욕할 때가 있다. 물론 교회가 사회의 지탄을 받을 실수를 하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교회와 그리스도를 싫어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 중에 대표 되는 자들이 공산주의자들과 이단자들과 타종교인들이다. 끊임없이 교회지도자와 성도들을 비방하는 안티 크리스찬들이 있다.

    슈바이처는 예수의 죽음은 실패의 죽음이라고 했고, 신학자 불트만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은 신화라고 말했다.

    우리는 예수님을 전할 때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분명하게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전해야 한다. 요한은 자신도 그리스도에 대하여 잘 알지 못했지만, 성령님이 가르쳐 주셔서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하였다. 성령님이 비둘기 같이 그의 머리 위에 머물게 되면,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자라고 가르쳐 주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33절).

    세례요한은 “자신도 처음에 주님이 그리스도이신 줄 몰랐다”고 두 번이나 고백하였다(31,33절). 그러나 성령님이 깨닫게 하셔서 예수님이 선지자들이 말씀하신 메시야이신 것을 깨달았다. 우리도 세례요한처럼 예수님이 누구신지 분명히 알고 전도해야 한다. 요한은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다”고 고백하였다(34절).

    예수님을 바로 전하려면 꾸준히 기도하고 성령님의 충만한 은혜를 받아야 한다.

    세례요한은 자신의 제자를 예수님께 보내다

    요한은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보냈다. 참된 구원자는 자기가 아니고, 예수님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기 중심적으로 일하지 않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가도록 했다. 그가 보낸 두 제자 중 한 사람은 시몬 베드로의 형인 ‘안드레’였다(40절). 또 한 사람은 밝히지 않았지만 아마 요한복음을 쓴 ‘사도 요한’일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측한다. 사도 요한은 겸손하여서 복음서를 쓰면서 자기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그냥 “사랑하는 제자”로만 표현하였다.

    세례요한이 두 제자를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한 까닭은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라야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위대한 전도자들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은 그를 소개하도록 부름 받았을 뿐이고, 진정한 메시야는 예수 그리스도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제자들을 자기가 붙잡고 있지 않고 예수님께 보냄으로 그들은 기독교 역사에서 위대한 인물들이 되었다.

    세례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가 그의 동생 시몬을 데리고 예수님께로 갔다. 시몬에게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 너도 그를 만나보라고 권하였다. 예수님께 시몬을 보시고 금방 그의 아버지 요한의 아들이며 시몬이라고 아셨다. 그리고 반석의 의미를 지닌 ‘베드로’(게바)란 이름을 지어주셨다(41,42절).

    주님은 안드레 형제와 같은 동네 ‘벳새다’에 사는 빌립을 부르셨는데, 빌립은 ‘나다나엘’을 찾아가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야를 만났다고 말하고 ‘와서 그를 보라’고 전도하였다(44-46절).

    우리는 사람들에게 전도하여 예수님을 만나도록 힘써야 한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말씀을 전파하라”고 하셨다. 한 영혼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구원을 얻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 04.21요 1:1-5로고스의 하나님
  • 04.14빌 4:1-3바울의 숭고한 동역자들

    빌립보 교회를 사랑한 바울

    바울 사도는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 감옥에 갇혔다. 지도자를 잃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교훈과 권면의 말씀을 편지로 적어 보냈다. 찾아온 교인들에게 그 간의 교회 소식을 듣고 그들이 신앙에 바로 서도록 권면하였다. 1절에 “사랑하는 형제들아 주 안에 서라”고 당부하였다. 바울이 볼 때에 신앙적으로 탈선하고 미진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빌립보 교회 공동체가 주님의 말씀대로 잘 순종하면서 든든히 서 있기를 바랐다.

    성도를 부르는 바울 사도의 호칭에서 그들을 향한 친근하고 사랑스러운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1절)라고 부르고 있다. 바울 사도의 마음에 교인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였다. ‘사랑한다’는 한 마디만으로도 충분한데, 마치 애인처럼 ‘사모한다’고 하였고,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이라고까지 극찬하였다. 바울은 그 교회를 개척하였고, 그 성도들은 자기의 기쁨이요 명예로운 상급이었다. 얼마나 빌립보 교인들을 사랑하였으면 그렇게 표현했을까? 빌립보 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맺어진 영혼의 친구들이었다.

    처음 비단 상인 ‘루디아’의 집에서 개척할 당시에 그들은 적극적으로 바울을 도왔던 동역자들이었다. 동역자를 ‘쉬지고스’(σύζυγος)라고 하는데, 동료 혹은 친구라는 뜻이다. 예수님 안에서 함께 말씀을 배우고 친해지다 보면 그렇게 사랑스러운 친구가 없을 것이다. 멀리 있는 부모형제보다도 어떤 때는 같은 교회 공동체의 성도들이 더 정이 갈 수 있다. 무엇보다도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서로 돕고 협력해야 하기 때문에 동역자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 배려하라

    인편으로 듣는 소식 중에 좋지 않는 내용도 있었다. 교회의 여성 중직자인 ‘유오디아’(향수)와 ‘순두게’(일치, 행운)가 불화하여 서로 다투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열심히 교회를 섬기려다가 서로의 의견이 대립한 것 같다. 그래서 바울은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였다(2절).

    사람들은 각자 자기 취향과 개성이 있다. 교회서도 봉사할 때 보면 권사님들이 각자 자기의 방식들이 있다. 또 목사나 장로나 안수집사와 같은 남성 중직자들도 자기의 주관과 정치적 이념들이 다를 수 있다.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자기의 뜻과 다르면 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삶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교회 안에서 열심히 봉사하지 않고 예배를 마치면 즉시 집으로 가는 성도들끼리는 싸울 일이 거의 없다. 열심히 봉사하다보니 서로 의견이 대립하기도 하는 것이다. 자기의 주장을 앞세우기보다도 예수님이시면 어떻게 하시겠는가를 생각하라. 그래서 바울 사도께서는 교인들에게 “주 안에 서라”,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였다.

    어느 노부부가 있었다. 남편이 생각하니 아내가 귀가 어두워진 것 같았다. 뭘 말해도 반응을 별로 보이지 않았다. 하루는 정말 귀가 먹었는지 테스트 해 보기로 하였다. 아내를 멀찍이 서 있게 하고, 남편이 뒤에서 “할멈, 내 말 들려요”라고 소리쳤다. 아내가 가만히 있었다. 좀 더 가까이 가서 “할멈, 내 말 안 들려”라고 다시 소리를 질렀다. 여전히 아내가 가만히 있었다. 아주 가까이 가서 귀에 대고 “내 말 잘 안 들려!”라고 소리쳤더니, 아내가 정색을 하고, “왜 소릴 질러요, 세 번씩이나 대답했잖아”라고 했다. 정작 귀가 먹은 것은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자기 귀가 먹은 것을 모르고 아내가 듣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우리는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자기 관점에서 남을 탓할 수 있다. 한 번 따라 해 보자. “나도 틀릴 수 있다”, “나도 실수한다”, “나도 가끔은 엉망진창이다”.

    우리의 표준은 세상의 정치 이념이나 사상이 아니다. 또 세상의 물질이나 사람의 능력도 아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푯대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인생의 표준이다. 자기의 생각이나 주관이나 방식을 기준으로 삼지 말고, 예수님의 생각과 방식을 기준으로 삼자. 예수님에게 맞추려고 마음을 모아야 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주 안에서 서라”고 권면하였다.

    왜냐하면 우리는 복음을 위하여 함께 동역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을 주체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과 복음을 드러내는 일에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는 다 같은 주님의 종들이기 때문이다.

    3절에서 말하는 ‘저 여인들을 도우라’는 뜻이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지칭하는 것이라면, 두 여인은 교회를 위하여 충성하고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들인 것 같다. 그러나 자기 방식이나 뜻대로 하려고 하다가 서로의 의견이 상충된 것 같다.

    그 여인들 뿐만 아니라 ‘글레멘드’와 또 다른 교인들도 다 같은 ‘동역자’라고 말하였다(3절). 지도자가 공석 중에도 성도들이 앞서 봉사하는 중직자들을 잘 도와서 교회가 질서 있고 화목하도록 하라고 권면하였다.

    오늘의 교회에 적용하면 혹시 담임목사가 공석 중이라도 패를 나누어 서로 자기 주장만 내세우지 말고, 협력하고 화목하라는 의미이다. 은퇴하신 장로와 권사는 뒤에서 조용히 기도하고, 시무 장로와 권사와 안수집사가 같은 마음으로 서로 협력하면서 교회를 지켜나가야 한다. 정말 질서 있고 화목한 교회는 담임목사가 없을 때 그 협력이 잘 드러난다. 담임목사가 없으면 서로 싸우는 교회가 있고, 담임목사가 없으면 협력하고 화목하는 교회가 있다. 담임목사가 없을 더욱 협력하고 질서를 지키는 교회는 모범적인 좋은 교회이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동역자들에게 “나와 멍에를 같이한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소가 밭을 갈 때에 두 마리나 그 이상씩 멍에를 함께 매고 일을 한다.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래서 바울은 “멍에를 함께 하였다”고 표현하고 있다.

    복음을 위한 동역자들

    바울 사도가 위대한 복음 전도자가 된 그 배후에는 훌륭한 믿음의 동역자들이 있었다. 바울이 가장 존경하고 귀하게 여긴 동역자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이다. 그들은 로마의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유대인들을 추방시킬 때 로마에서 쫓겨난 신자였다. 바울과 같이 장막을 만드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고린도에서 물질적으로 바울의 사역을 돕다가(행18:2,3) 함께 에베소로 건너갔으며 거기서 성경 교사 ‘아볼로’에게 성경의 도를 자세히 풀어 가르쳐주었다(행18:18-26).

    클라우디우스가 죽은 후에 그들은 다시 로마로 되돌아갔으며, 바울은 로마에서 맨 먼저 이 부부의 안부를 물었다(롬16:3,4). 사도 바울은 브리스길라 부부는 바울의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이라도 내놓을 수 있는 생명 같이 귀한 동역자로 소개하고 있다.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롬16:4).

    바울은 복음 사역을 위하여 함께 힘써 일하던 신앙의 여인들과 그 동역자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있다고 말씀하였다.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고 헌신하는 성도들, 특별히 복음 사역자들을 도운 자들은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다. 바울을 도왔던 동역자들의 이름이 성경에 남아서 약 이천 년 동안 기독교성도들에게 알려졌다. 뿐만 아니라 복음 전파를 위하여 수고하고 때로 욕을 먹고 박해를 받을 때에 그 상이 크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평신도들이 목회자와 선교사들을 도와서 시간과 물질을 바쳐 헌신할 때에 선지자나 의인들이 받는 상을 같이 받게 될 것이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5:10-12).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마10:41).

  • 04.14마 6:9-15용서하라
  • 04.07요 21:17-18예수님의 최대 관심은 교회

    필리핀의 교회들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최대 관심은 교회다. 모든 민족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하여 교회를 세우실 것이다. 선택된 모든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위하여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이번에 저와 두 분 장로님께서 필리핀 세부 ‘고르도바’에 다녀왔다. 선교 기간 동안 현지 몇 교회를 둘러보았다. 처음에 간 교회는 세계를 위한 말씀교회였다. 48세 목사님이 창고를 얻어 교회를 하고 있었다. 찬송을 잘 인도하는 목사님이었다. 앞으로 땅을 사서 예배당을 지어야 한다고 말했다.

    두 번째 교회는 ‘주님은 우리의 의’라는 교회였다. 그 사역자는 31살이었고 평신도인데 그의 장모댁에 개척을 하여 스무 명 정도가 예배를 드린다고 하였다. 그의 먼지 쌓인 좁은 창고 같았다. 의자도 성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생활을 위하여 트럭 운전을 한다고 하였다. 언제 기도하고 설교 준비하느냐고 물었더니, 일하는 틈틈이 한다고 하였다. 신학 수업도 안 하고, 성경도 깊이 연구하지 않으면서 목회를 하려니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그러나 다들 부지런히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천주교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하지만 어쨌든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좋아하였다.

    이번 목회세미나에는 25명이 모였다. 호세아서를 배우고 바로 이번 주일에 배운 것을 설교하겠다는 목사도 있었다. 또 채장로님이 약을 몇 가지 사 가서 모든 교회에 나누어 주었는데 세 사람이나 약을 먹고 치료를 받았다고 말했다.

    필리핀 구석구석에는 청소년들과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보통 한 가정에 4-5명 이상의 아이들을 낳았다. 영혼 구원의 황금어장이다. 앞으로 더 많은 교회가 세워질 것이다.

    일곱 제자들이 잡은 153마리의 물고기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부활하신 것을 목격했어도 아직 복음사역자로 나서지 못하고, 여전히 어부에 머물러 있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간다”고 하자 다른 제자들이 따라나섰다. 그러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했다(3절). 이제 그들은 사람을 낚으라는 영적 사명을 감당해야 할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육신적인 일이 순조롭게 되지 않았다.

    새벽녘에 예수님이 찾아오셨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라고 물으셨고, 그들은 없다고 대답하였다. 주님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일곱 제자들이 잡은 물고기는 153마리나 되었는데 그물이 찢어지지는 않았다. 말씀대로 순종한 제자들은 놀랍게도 아주 많은 고기를 잡았다. 너무 많아서 그물을 들 수 없었다(6절).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11절)

    신기한 일이었다. 큰 물고기들만 잡힌 것도 신기한 일이었다. 모두 시장에 내다 팔 상품이 될 만한 고기만 잡힌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작은 것도 섞여 있어야 정상적이다. 153 마리나 많이 잡힌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 많은 고기들을 끌어 올리는데도 약한 그물이 찢어지지 않는 것도 신기한 일이었다. 그물에 든 고기의 수를 확인시킨 것도 주님의 뜻이 담겨 있다.

    장차 주님의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도할 것이다.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교회를 세우게 될 것을 암시하셨다. 153은 온 세상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날 것을 상징하는 수이다. 그물이 찢어지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뜻하는 것이다.

    153의 영적 의미

    예수님은 친절하시게도 아침 조반을 준비해 놓으셨다. 숯불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었다(9절). 아주 간단한 식사였지만 밤새 고생한 제자들을 가엾게 보시고 친히 식사를 준비해 놓으셨다. 그리고 방금 잡은 싱싱한 생선을 좀 가져오라고 하셨다(10절).

    시몬 베드로가 큰 물고기로 가득 찬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고 그 물고기를 헤아려 보았다. 시장에 내다 팔 수 있는 상품 생선이었다. 아마 베드로는 그 놀라운 수확에 대하여 기억하려고 물고기의 수를 확인한 것으로 짐작된다. 예수님은 영적 교훈을 주시기 위하여 베드로가 잡힌 고기가 얼마나 되는지 확인하도록 하신 것이다.

    누가복음 5장에서는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 비슷한 방법으로 물고기를 잡게 하셨는데, 그 때는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졌다”고 되어 있다. 이번에는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고, 큰 물고기가 153 마리가 잡혔다. 도대체 주님께서 153이란 수를 제자들에게 상기시키신 까닭이 무엇이었을까?

    부활의 주님의 최대의 관심사는 인류의 영혼을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이 153이란 수는 구원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란 의미를 품고 있을 것이다. 153은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이 물질적인 복을 많이 받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만세 전에 선택된 하나님의 자녀들을 다 구원하실 것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1993년 호주의 Technical Journal지 “성경의 153이 상징하는 의미”에 대하여 한 과학자가 논문을 발표했다. 첫 번째 153이 의미하는 것은 구원받게 될 하나님의 자녀를 뜻하는 수이다. 히브리어 자음 알파벳 22개는 각자 상징하는 수가 있다. 153의 숫자 값을 가진 히브리 단어는 ‘그 하나님의 아들들’(םיהלאה ינב :The sons of God)이다. 2,50,10,5,1,30,5,10,40을 모두 더하면 153이 된다.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을 사람들을 뜻한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졌고 153 마리의 고기를 잡았다. 그냥 물고기를 많이 잡았다고 기록해도 될 것을 굳이 그물 속의 고기를 헤아려 153 마리였다고 기록한 것은 그 내용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성경이 중요하게 기록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는 것을 원하신다. 그 일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생명을 바치게 하셨던 것이다.

    두 번째 153이 의미하는 것은 거룩 거룩 거룩하신 하나님을 상징하는 수이다. 하나님이 임재하셨던 성막의 지성소는 10규빗(약4.5m)의 정육면체 공간이다. 153은 완전하고 거룩한 것을 상징하는 수이다. 1의 삼제곱+ 5의 삼제곱+ 3의 삼제곱은 153이다. 그래서 153은 정육면체의 지성소를 의미한다. 영적으로는 오늘날의 교회를 뜻한다. 그리고 지성소에 임하시는 거룩 거룩 거룩하신,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153 마리의 고기를 잡히게 하셔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지극히 거룩한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권면하셨다. 바로 그 거룩한 일은 잃어버린 하나님의 아들들을 찾는 일이었다.

    그리고 구약 성경에 나타난 153의 수를 지닌 히브리어 단어가 네 개 더 있다. 첫 번째 “나는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다”(아니 여호와 엘로헤이카: ךיהלא הוהי ינא)라는 단어이다(사43:3).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81:10).

    두 번째 단어는 “그는 충성된 자, 혹은 신실한 자”(네에만 후: אוה ןמאנ)란 뜻이 있다.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민12:7),

    그리고 세 번째는 “그 유월절”(하-파싸흐: הספה)이란 뜻이 있는데, “죽이다. 그 유월절을”이란 문장으로 그 단어에는 양이 함축되어 있다. 그래서 성경 번역자가 “유월절 양으로 잡고”라고 번역하였다.

    “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의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출12:21).

    그리고 153을 이루는 네 번째 단어는 상속한다는 의미로 ”기업을 차지하게 하다“(얀히레나: הנלחני)란 단어가 있다.

    “네 앞에 서 있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리로 들어갈 것이니, 너는 그를 담대하게 하라. 그가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게 하리라”(신1:38).

    153을 이루고 있는 문장 넷을 모두 조합해 보면 ”나는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며 신실한 자다. 그러므로 유월절 어린양이 대속의 피를 흘림으로 영적 기업을 너희에게 상속하였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최대의 관심

    부활하신 주님의 최대 관심사는 교회 공동체이다. 한국이든지 필리핀이든지 이스라엘이든지 어느 나라에든지 하나님은 자신의 교회를 주목하신다. 다시 고기잡이에 나선 제자들에게 153 마리의 고기를 잡게 하셨다. 그것은 그들이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게 될 것을 암시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의 대표인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셨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말했던 사람인지라 자신 있게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기 송구스러웠다. 그러나 베드로를 위시한 모든 제자들은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대신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식사하면서 진정으로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했을 때,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세 번 말씀하셨다(15-17절). ‘먹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하라는 것이고, ‘치라’는 것은 시험에 빠지지 않고 바른 길로 인도하라는 뜻이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세 번 강조하신 당부의 말씀은 교회 공동체를 말씀으로 세워달라는 것이었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뭇 영혼들을 전도하여 주님의 교회를 세우고 그들에게 말씀으로 먹이라는 것이었다.

    우리의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님의 양들을 윤택하고 복 되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온 세상의 교회들을 통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 진리의 나라가 세워지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 놀라운 사역을 위하여 주님은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를 지셨고 보혈을 흘려주셨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